“아부지, 옛날에 파란 비닐 우산 기억나?”
전북 정읍에서 6년째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가 중인 안복순(72)씨는 기다림에 익숙하다. 요양원 어르신들은 묻는 말에 즉각 대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 종이 위 그림으로 시선을 끄는 방법을 터득했다.
오늘의 수업 주제는 추억 속 대나무 비닐우산이다. 최근 일은 흐릿해도, 옛 생각은 종종 꺼내곤 하는 어르신들의 기억을 자극할 수 있을까 해서 그림 위에 붙일 파란 비닐도 가져왔다. 안씨는 “이 우산 언제 써. 비올 때 쓰지? 여기 빗방울 좀 그려봐요” 하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멀뚱멀뚱 의자에 앉아만 있던 어르신이 색연필을 들었다. 그러곤 흰 종이에 빼곡하게 빗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삐뚤빼뚤하던 동그라미들이 점점 일정한 모양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안씨는 이런 순간들이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안 하신다고 하더니 너무 잘하네! 아부지 이름도 쓰셔. 오늘 날짜도 적자.”
정읍북부노인복지관의 공공형 노인일자리 ‘한울타리 사업단’은 치매 예방, 민요 공연, 건강 마사지 등 다양한 주제의 재능 나눔 프로그램을 가지고 지역 경로당·요양원을 찾아간다. 집에서 무료함을 달래는 노인에겐 일거리를 주고, 돌봄이 필요한 노인에겐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방이 논밭뿐인 곳까지 직접 찾아와 각종 프로그램을 해준다는 소식에 지역 요양원들이 줄을 섰다. 지난달 29일 안씨를 비롯한 어르신들이 찾아간 정읍 대신리 보듬우리요양원도 가까운 시내에서 차로 20분 넘게 달려야 하는 위치에 있다. 복지관 관계자는 “차 대절을 지원해 줄 테니 제발 와 달라는 센터도 여럿 나왔다”고 말했다.
한울타리 사업단의 인기는 ‘좋은 노인일자리’에 대한 수요를 증명한다. 이 사업은 참여자의 자기효능감을 향상하고 지역 복지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한국노인인력개발원(개발원)의 노인일자리 우수사업에 선정됐다.
노인일자리 사업이 양적 확대를 넘어 질적 성장을 이루려면 한울타리 사업단처럼 참여자의 만족감이 놓고 생산성도 있는 사업이 늘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장에선 좋은 노인일자리를 만드는 열쇠는 ‘수요처 발굴’과 ‘참여자 교육’에 있다고 강조했다.
◆받는 노인에서 주는 노인으로
“내가 자격증을 달고 선생님 소리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6년째 한울타리 사업단에서 일하는 박순자(79)씨는 지난달부터 ‘인지미술지도사’라고 적힌 목걸이를 목에 걸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한국노인통합교육개발원의 노인인지미술지도사 1급 자격증서다. 안씨도 마찬가지다. 안씨는 복지관 칠판에 붙어 있는 자격증서를 자랑하며 “인터넷으로 강의를 한달 반 정도 들었는데, (담당자)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전파된다. 최춘희(81)씨는 “난 아직 자격증은 없지만 열심히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정읍북부노인복지관 노인일자리 사업 담당자 양모(57)씨는 “한울타리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르신들의 자존감 향상”이라며 “민간자격증이긴 하지만 사업 참여 어르신들이 목걸이를 걸고 가면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교구를 준비해 가면 ‘같은 노인인데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하던 이들도 점차 자신이 모르는 걸 가르쳐 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요양원 직원들도 사업 참여 어르신들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정읍북부노인복지관 관계자는 “요양보호사·사회복지사들한텐 프로그램 개발이 큰 부담인데, 이걸 우리가 나서서 덜어준다고 하니 반길 수밖에 없다”며 “그래서 노인일자리라고 얕보는 분위기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정읍북부노인복지관 유두희 관장은 “주기만 하는 복지는 구식”이라고 강조했다. 유 관장은 “한울타리 사업 어르신은 스스로를 ‘동네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접받는다”면서 “내가 잘하는 것을 찾고, 이를 통해 봉사하면서 자존감을 높인다”고 자부했다.
◆“어르신 일자리, 전문화하자”
한울타리 사업단도 어려움은 있다. 이들도 인력·예산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사업 담당자 양씨는 한울타리 사업단 45명 외에도 시장형 일자리 등 도합 173명을 관리하고 있다. 특히 교구나 재료비 등이 추가로 드는 한울타리 사업은 참가자들이 업무시간 외 추가로 봉사단 활동을 해 한국노인종합복지관으로부터 예산을 따와 보태는 상황이다.
양씨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노인일자리의 전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씨의 구상은 몇 년 정도 공공형 일자리에서 경험을 쌓은 어르신을 관리자 역할로 채용해 재료 구입이나 스케줄 조정, 조 편성 등 전담인력이 하고 있는 일을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많아도 세 번, 하루에 3시간으로 정해진 공공형 노인일자리의 작업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양씨는 “어르신을 사회서비스형 일자리로 채용해 전담인력이 하면서 주도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선 사흘 고추만 따도 공익형 노인일자리 월급인 29만원을 벌 수 있다. 사업 참여 어르신에게 적절한 노동시간을 확보해 주면서 급여도 높이려면 사회서비스형 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양씨는 “어르신들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몇 년만 더 하면 새로운 수요처를 스스로 개발하는 것까지도 가능할 것이라 본다”고 자신했다.
노인일자리는 크게 공익형·사회서비스형·시장형으로 나뉜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반적인 일자리 형태인 사회서비스형·시장형과 다르게 공익형은 월 30시간밖에 일하지 않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점 때문에 노인들을 ‘일하는 노동자’가 아닌 ‘복지 수혜자’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해 왔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 스스로도 공공형 일자리를 복지 프로그램 정도로 인식한다”면서 “자기효능감은 이익을 창출하고 그게 자기 생활에 보탬이 됐을 때 느끼는데, 대부분의 공공형에선 어렵다”고 지적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공익형 노인일자리는 65만4000개에 달하지만, 사회서비스형은 15만1000개로 14.7%에 그친다. 시장형은 22만5000개(21.8%)다. 복지부는 내년 이 비율을 각각 15.6%, 21.4%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그에 맞는 지원도 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 교수는 “아무나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기초수급자인 노인일자리 지원자는 교육과 전문성이 부족한 상태로 일터에 나선다”면서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사전 교육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지난해 11월27일∼12월10일 사업 담당자 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회서비스형 사업 참가자의 전문성·경력 확보 수준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편이다. 담당자 21%는 ‘충분하지 않다’, 46%는 ‘보통이다’고 답했다. 충분하다고 답한 담당자는 총 28.7%에 그쳤다.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老老)케어 프로그램도 의도는 좋았으나 수혜자가 봉사자 노인으로부터 서비스를 받길 꺼려하는 문제가 있었다”면서 “현장에서 인정받을 충분한 전문성을 갖춰야 노인일자리가 자리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자리 발굴, 참가자 교육 등을 담당하는 인력이 지금은 너무 빈약하다”면서 “현장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할 수 있으려면 중앙정부 차원에서 시스템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