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바르니에와 한덕수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프랑스가 지난 7월 하원의원 총선거 후 거의 2개월 만에 새 총리를 맞아들였다. 총선에선 야당인 좌파 연합 신인민전선(NFP)이 가장 많은 의석을 얻어 원내 1당으로 떠올랐으나 정작 총리 자리는 4당인 우파 공화당 소속의 미셸 바르니에(73)에게 돌아갔다. ‘총선 민심을 받드는 것이 순리’라는 원칙에 비춰 보면 다소 뜬금없는 인선이 아닐 수 없다. 현대 프랑스에서 최고령 총리에 해당하는 바르니에는 과거 자크 시라크 대통령 밑에서 외교부 장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밑에서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 정계 거물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활동이 뜸했던 ‘올드보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 집권당과도 별로 가깝지 않다. 그런데도 마크롱이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프랑스 의회의 역학 구조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그가 최근 임명한 미셸 바르니에 총리. 게티이미지 제공

총선에서 NFP가 다수당이 되긴 했으나 하원 전체 의석 577석의 과반(289석 이상)에는 크게 모자란다. 2당인 마크롱의 중도 집권당, 3당인 극우 성향 국민연합(RN)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세력도 단독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한 것이다. 프랑스 헌법상 총리와 그가 이끄는 내각은 의회의 신임 대상이다. 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이 가결되는 경우 총리는 물러나야 하고 정부는 무너지고 만다. 그동안 대통령들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원내 과반 정당이 지지하거나 적어도 반대하지 않는 인물을 총리로 기용해왔다. 마크롱은 원내 과반 정당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의원들이 가장 덜 싫어할 사람, 그러니까 굳이 불신임 투표를 통해 몰아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는 인사를 총리로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원내 1당인 NFP는 강하게 반발했다. “비록 과반은 아니지만 엄연히 다수당인 우리가 총리를 배출하고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그들의 주장이 마크롱에 의해 묵살당했기 때문이다. 앞서 NFP는 재정 전문가인 좌파 성향의 루시 카스테트(37)를 총리 후보자로 천거하며 엘리제궁에 임명을 요구했으나 마크롱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NFP가 아무리 용을 써도 의회에서 바르니에 총리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기엔 의석이 부족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NFP가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면 중도 집권당이나 극우 RN과 연대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당장 RN은 “바르니에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며 불신임에 가담할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이에 NFP는 “마크롱 뒤에는 RN의 지도자 마린 르펜이 있다”며 맹비난하고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 사진은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모습. 뉴시스

지난 4·10 총선에서 여당인 국민의힘이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 참패한 뒤 한덕수 국무총리는 “책임을 지겠다”며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의를 밝혔다. 대통령실은 이를 받아들이고 한동안 새 총리 후보자를 물색하는 듯하더니 요즘은 아예 손을 놓은 모습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총리 인선에 관한 질문을 받고선 “당분간 한 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 체제를 유지할 것”이라며 “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여소야대 하에서 총리를 교체하려면 결국 야당이 지지하는 인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거론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정작 총리 임명의 키를 쥔 야당의 태도다. 프랑스 NFP처럼 “총선 민심을 받들어 새 총리를 발탁하라”며 “우리가 후보자를 추천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는다. 총리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건지, 총리 후보자 추천을 통해 국정 운영의 부담을 공동으로 짊어지긴 싫다는 건지 당최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