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2018년 10월 “택배 올 것이 있다”는 아내 말을 듣고 보관소로 갔다. 그의 집은 아파트 17층에 있었다. 보관소에서 ‘170○호’라고 적힌 택배 상자를 집어든 A씨는 바로 옆에 있던 상자도 그의 집으로 온 것인 줄 알고 챙겼다. 해당 택배 상자에는 ‘70○호’라고 적혀 있었다. 어찌 사달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집으로 와야 할 택배 상자가 사라졌다”는 70○호 주민의 신고가 즉각 접수됐고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솔직히 폐쇄회로(CC)TV만 살펴보면 될 일이니 경찰 입장에선 그리 어려운 수사도 아니었을 것이다.
택배 상자 보관소의 CCTV 영상을 검증한 경찰은 A씨를 절도 용의자로 입건했다. 느닷없이 경찰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A씨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절도 혐의 피의자라고?’ 경찰에 출석한 A씨는 “택배 상자에 붙은 번호가 비슷해 헷갈렸다”고 항변했다. 경찰에서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A씨에게 남의 물건을 가로채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형사처벌까지 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봐 기소유예로 사건을 종결했다. 그래도 억울함을 참을 수 없었던 A씨는 헌법재판소에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가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A씨는 비로소 무혐의 판정을 받아들고 결백을 입증할 수 있었다.
기소유예란 특정인의 범죄 혐의가 인정되더라도 검사가 그의 전과 유무, 반성 정도 그리고 피해자의 피해 규모나 피해자와의 합의 내용 등을 고려해 불기소하는 처분을 뜻한다. 기소를 피한다는 점에서 무혐의와 같으나 찜찜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튼 죄를 짓지 않았느냐’는 주변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현행법상 검찰이 내린 기소유예 처분을 번복시킬 방안은 헌재에 헌법소원을 내는 것뿐이다. 위헌 법률 심판이나 탄핵 심판처럼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중차대한 사안을 처리해야 할 헌재가 그런 자잘한 일까지 맡아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무혐의냐, 기소유예냐는 한 인간으로서 명예가 걸린 일 아니겠는가.
헌재가 지난 8월29일 서울중앙지검이 전모(64)씨에게 내린 기소유예 처분을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취소한 사실이 8일 전해졌다. 전씨는 2022년 8월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우산 보관함에서 남의 우산을 가져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전씨는 “내 우산인 줄 착각하고 잘못 가져간 것”이란 주장을 폈으나, 경찰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절도범으로 몰린 점이 억울했던 전씨는 결국 헌재의 문을 두드렸고, 재판관 9명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 편의점에서 파는 흰색 또는 검정색 비닐 우산이 대세인 시대에 우산을 헷갈리는 것은 흔한 일이니 수긍이 간다. 다만 ‘착각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