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붉은 색채의 덩어리들 가운데 ‘일곱 명의 기사’(2024)가 일어선다. 뭉개진 고깃덩이처럼, 무너진 건물의 잔해처럼 파편화된 세계에 발 디딘 작은 몸들이 반쯤 투명한 피부로서 주위의 빛을 투과한다. 저마다의 인체는 자신이 깨어난 거푸집의 흔적을 윤곽 언저리에 매단 채다. 스스로 비롯된 세계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한 투박하고도 불완전한 만듦새로서 말이다. 원형의 틀을 부수고 나온 존재들, 동일한 근원의 땅에서 태어난 일곱 명의 기사들… 주위의 자연은 그들과 같은 성질의 빛을 지녔다. 우리 모두가 실은 하나의 별에서 부서져 나온 파편이듯이.
이동욱(48)이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이달 4일부터 10월12일까지 ‘붉고 빛나는’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연다. 그는 폴리머 클레이의 일종인 스컬피(sculpey)를 빚어 만든 섬세한 인물 조각으로 잘 알려진 조각가다. 8년 만에 개최하는 이번 개인전에서는 재료 및 형태의 변주가 돋보이는 조각과 설치작품 총 13점을 선보인다. 자연과 사회, 인간과 사물을 아우르는 관계성 및 재료의 본성에 깃든 생명력에 관한 탐구로부터 건져 올린 결과물이다.
또다른 전시공간을 가득 메운 ‘빛나는’(2024)은 은빛으로 빛나는 나뭇가지를 은색 끈으로 묶어 고정한 뒤 유사한 빛깔의 오브제들을 결합하여 완성한 설치작품이다. 온갖 반짝이는 것들을 물어다 놓은 새의 둥지처럼, 나뭇가지 위의 사물들은 일상에서 쉬이 버려지는 빵 봉지의 포장 끈이나 갑옷을 연상시키는 그물, 값비싼 자동차의 엠블럼 등으로 다양하다. 신비한 마법진과 같이 거대한 원형으로 엮인 나뭇가지는 투명한 좌대를 지지체 삼아 땅으로부터 일정 높이 떠오른 모습이다. 나뭇가지의 주름진 피부를 얇게 뒤덮은 백금의 광택이 하얀 대리석 바닥과 인공 조명으로 연출된 전시장 내 광원을 고요하게 반사하며 생경한 풍경을 구축한다.
둥근 궤적의 중심부 더 높은 공중에는 은빛 심장이 떠 있다. 심장을 위한 백금 갑옷은 연약한 살갗을 강인하게, 유한한 생명을 유구하게 만들고자 바라는 마음이 빚어낸 보호구이다. 마른 식물의 잔해 위에 정제된 광물의 피막을 입히는 섬세한 작업 가운데서 작가는 사라짐을 애도하고 남겨짐을 연민했을까.
여리디 여린 백금의 막은 시든 존재의 생을 돌이키는 대신, 그것이 은색의 공통분모를 지닌 여러 다른 사물들과 눈부시게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이끈다. 공간을 크게 두른 원형의 울타리로부터 아직 부화하지 않은 심장을 알처럼 품은 이름 모를 새의 둥지를 연상해 본다. 결국 붉은 것도, 빛나는 것도 생명이다.
이동욱은 1976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2001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학부 졸업 후 2003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024; 2012), 아라리오뮤지엄 제주 동문모텔II(2016), 페리지갤러리(2016), 스톡홀름 샬롯룬드갤러리(2013), 두산갤러리 뉴욕(2012)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내외 주요 미술관 및 기관의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버거컬렉션(홍콩), 루벨 패밀리 컬렉션(미국), 금일미술관(중국) 등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 및 재단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조각의 살, 조각의 눈
이동욱은 조각의 언어로써 대상의 표피와 내면 사이 이질적인 정체성을 드러내어 보이는 시도를 거듭해 왔다. 통조림 캔이나 식음료와 같이 대량생산되는 상품의 패키지가 상징하듯, 특정한 용도를 위해 대상에 덧씌워진 표면적 이미지와 그 내용물 사이 간극을 대조하는 방식을 통하여서다. ‘일곱 명의 기사’와 닮은 붉은빛 재료를 사용하여 코카콜라 병을 여럿 주물로 뜬 뒤 실제 제품과 함께 배치한 작품 ‘코카콜라는 빨간색’(2024)이 그러한 의도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콜라의 색상은 결코 붉지 않은데, 거대 기업의 전략에 의하여 우리의 머릿속에 심긴 환상만이 뚜렷이 빨간색이다.
한편 서로 다른 성질의 광물을 결합하여 만든 손바닥 크기 남짓의 조각 연작 제목은 설명을 함구하듯 일제히 ‘무제’(2024)다. 이동욱은 한동안 수석을 모으는 취미를 지녀 갖가지 색다른 돌의 생김새에 매료되었던 바 있다. 사람과 사람이 닮은 듯 각자 다른 것처럼 광물 또한 공통된 성질을 품은 동시에 저마다 고유한 특질을 띤다. 작은 덩어리들은 좌대 대신 삼각대의 가느다란 수직선 위에 놓임으로써 그 자체의 부피와 양감을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오색 빛깔의 돌과 매끈하게 제련된 금속이 정교하게 맞물려 하나의 몸을 이루는 가운데 질감 및 색채의 극명한 대비가 특유의 조형적 미감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몇몇 조각의 표면에는 작은 원형 프리즘들이 부착되었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낱낱의 덩어리가 지닌 ‘눈’과 같은 요소다. 프리즘은 어느 각도에서든 바라보는 이의 눈빛을 거울처럼 비추어 보여 준다. 마치 광물로 이루어진 조각의 몸이 생명을 갖고 상대와 눈을 맞추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동욱이 만든 조각의 피부는 때로 연약한 존재를 보호하는 껍질이고, 때로 재료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살덩이다.
보는 자의 시선은 프리즘에 부딪혀 고스란히 되돌아옴으로써 보이는 자의 응시로 탈바꿈한다. 문득 이곳의 모든 우리가 같은 자연의 땅에서 비롯된 물질들임을 상기한다. 조각은 사람이 되고, 이내 사람도 조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