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배우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미술 투자 상품을 판매한 연매출 500억원대의 A갤러리가 ‘폰지 사기’ 논란에 휩싸였다. 서울 동대문구에 본사를 둔 A갤러리는 고객이 미술품을 구매하면 이를 필요로 하는 곳에 대여해 매달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는 투자 상품을 중개했는데, 대규모 미정산 사태를 일으키고도 이를 숨긴 채 신규 고객을 유치해 현금을 돌려막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달 청담동 모 갤러리 대표가 유사수신 및 사기 혐의로 구속 송치된 데 이어 또다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문가들은 ‘아트테크(아트+재태크)’ 시장 전체의 신뢰가 의심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9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A갤러리는 올해 초부터 그림을 구매한 고객들에게 연 7∼9%의 수수료를 지급하고, 계약기간 내로 그림을 반환하면 원금을 돌려주겠다는 내용의 계약을 지키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피해자 단톡방에 따르면 피해 고객만 400여명으로 추정되며, 인당 피해액은 수천만원에서 3억원까지 다양했다. 원금 미반환 규모는 최대 1600억원(2022년∼올해 7월 계약 총액)까지도 이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금융감독원과 서울경찰청에 민원이 접수됐고, 현재 서울 동대문경찰서에서 수사 중이다.
올해 7월 갤러리 김모 대표를 사기 및 유사수신 혐의로 동대문서에 고소한 직원 B씨는 “갤러리가 외부에 경영 악화 사실을 숨긴 채 직원들에겐 ‘영업만이 살길’이라며 새 고객 유치를 강권했다”며 “최근까지도 밀린 대금을 15개월 뒤 150%로 지급하겠다는 둥 핑계를 대며 돈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B씨는 직원이면서 이곳에서 미술품 투자 계약을 맺은 고객이다.
지난달 갤러리는 회사 상황을 고려해 고객의 작품 반출을 허가한다고 공지했는데, B씨는 “애초에 다른 곳에 대여 중이었어야 할 그림이 창고에 전부 쌓여 있다는 건 처음부터 사업을 제대로 운영할 의지가 없었단 이야기”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B씨는 갤러리의 주식 판매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다. 갤러리 내부 자료에 따르면 A갤러리는 올해 미정산 사태를 숨긴 채 회사가 100억원 상당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대외비 자료를 만들고, 개인 투자자들에게 “공모가보다 저렴하게 주식을 살 수 있다”며 미상장 주식을 판매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작성된 실사보고서에는 지난해 7월 D투자조합으로부터 2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내용뿐이다. 정황상 정확하지 않은 투자 규모가 담겼고, 공모가 자체도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D투자조합 대표이사 김모씨는 지난해 7월부터 A갤러리 이사로 취임했다.
실제로 이렇게 A갤러리의 주식을 산 김모(48)씨는 매매계약을 체결했지만 주권미발행확인서를 받지 못했고, 자신이 주주현황에 등재되지 않은 것을 보고 비정상 거래로 의심하고 있다.
B씨는 “갤러리는 화가에게 36개월 할부로 그림값을 지불하는데, 최근 이조차 체납될 정도로 경영난이 심하다”면서 “이런 상황에서조차 김 대표는 본인 명의의 외제차 5대를 리스하며 월 800여만원을 지출하는 등 방만 경영을 이어갔고, 경영진은 월급을 자진 반납하는 등 형식적인 제스처만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A갤러리의 사업 내용에서도 속속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갤러리는 주로 3년으로 규정된 계약기간 내 고객이 환불을 요청할 경우 첫 구매가 그대로 갤러리가 이를 재매입할 의무를 지도록 해 일종의 ‘원금 보장’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22년부터 해당 조항은 교묘히 바뀌어 갤러리가 재매입 의무를 지지 않도록 변경됐다. A갤러리는 올해 들어 옛 계약서를 가진 구매자들에겐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새 조항으로 변동하는 동의서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갤러리가 애초에 부풀린 가격으로 그림을 판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갤러리는 투자상품을 홍보하면서 그림 판매가는 업계에서 인정받는 한국미술협회(미협) 호당 가격대로 책정된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캐슬린 김 변호사(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겸임교수)는 “미술품 가격을 호나 규격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설사 호당 가격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작가 본인 또는 갤러리·소장자가 얼마든지 호당 가격을 조정할 수 있다”며 “전문가가 제시하는 가격조차 가격에 대한 해당 시점의 의견에 불가하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C씨는 “A갤러리에서 1500만원짜리 그림을 계약했는데 실제로 같은 작가의 같은 크기 그림을 300만원에 팔고 있었다”고 말했다.
A갤러리는 이렇게 모인 자금을 부동산 투자에 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사보고서에 따르면 갤러리는 오피스텔 사업에 35억원을 투자했으며, 2021년 수도권과 제주 등에 39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취득했다. 갤러리는 지난달 “500억원 규모의 부동산 자산을 매각해 영업을 정상화하겠다”고 공지했다.
세계일보는 해명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갤러리에 통화를 시도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술 투자를 내세운 갤러리가 억대 미반환 사태를 일으킨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E갤러리는 A갤러리와 거의 유사한 대여 수익 형식의 미술투자 상품을 내세웠다 최소 200명의 투자자에게 돈을 돌려주지 못해 고소당했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E갤러리 대표·관계자 등 3명을 사기 및 유사수신 혐의로 검찰에 구속 송치했다.
아트테크 투자 사기가 반복되면서 미술품이 투자사기에 특히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변호사는 “미술품은 가격을 평가하는 단일한 기준이 없다 보니 미술에 대한 이해와 애정 없이 투자 목적으로만 접근한다면 이만큼 위험한 상품도 없다”고 경고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술품은 비전문가인 개인이 가격을 검증하기 어려워 특히 폰지 사기에 취약하다”면서 “거의 모든 미술품 조각투자가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그러다 보니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갤러리까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우려했다.
홍 교수는 “미술품의 특성 자체가 조각투자에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다. 규제를 통해서도 풀기 어려운 문제”라면서 “미술품 투자는 특히 조심해서 접근해야 하고, 결국 미술품 투자는 개미들이 할 게 아니라 전문가들이 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자격증 남발하고 ‘다단계 영업’에 악용도
A갤러리가 민간자격증 제도를 이용해 사실상 건실한 업체로 포장한 정황도 있다. 갤러리 관계자들이 갤러리와 무관해 보이는 협회를 설립하고, 협회에서 민간자격증을 발급해 자사 영업직을 외부 검증을 거친 전문가처럼 둔갑시킨 것이다.
특히 느슨한 민간자격 제도 때문에 최초 심사만 통과하면 누구나 별다른 검증 없이 자격증을 운영할 수 있어 이 같은 악용 사례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9일 취재를 종합하면 A갤러리는 갤러리 영남지역단 부사장 장모씨가 대표로 있는 사단법인 한국아트딜러협회를 통해 사실상 자사 내에서만 통용되는 ‘아트딜러’ 민간자격증을 운영했다. 2019년 A갤러리가 직접 동명의 자격증을 등록했다가, 2021년 협회를 설립해 재차 등록했다. 최근 A갤러리가 대규모 미지급 사태를 일으키면서 현재 협회 홈페이지에도 시험 접수가 잠정 중단된다고 공지된 상태다.
해당 자격증의 실상은 이미 난립해 있는 수많은 민간자격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격시험은 협회에서 제공하는 강의를 수강하면 누구나 손쉽게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 민간자격정보서비스에 따르면 A갤러리의 아트딜러 자격은 2022년 2348명이 취득했으며 당시 합격률은 95.4%에 달했다.
자격증 권유 과정에서 다단계 영업이 이뤄진 정황도 드러났다. A갤러리에서 딜러로 활동한 직원 B씨는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수강료가 36만원인데, 추천인 코드를 입력하면 추천한 사람에게 18만원이 돌아가는 구조”라며 “그림 중개보다도 수익률이 좋아 오로지 자격증 영업만 하는 직원이 있을 정도였다”고 고발했다.
협회와 갤러리 측은 아트딜러 자격이 ‘정부 인증 민간자격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아트딜러가 ‘연봉 5000만원짜리 미래 유망 직업’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아트딜러는 지난해 11월 SBS 케이블 채널 FiL에 미래 유망 직업으로 소개됐고, 트로트 가수 B씨가 직접 해당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이 방송에 실렸다. 해당 자격을 관리하는 주무 부처가 문화체육관광부라는 내용이 ‘한국 최초로 문화체육부 승인을 받은 자격증’으로 포장돼 포털사이트 블로그 등에 무분별하게 노출되기도 했다.
민간자격증에 대한 과장 광고와 허술한 관리는 수년째 지적된 문제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직능원)은 민간자격 최초 등록 시 국가자격 관련 법령 위반 여부만 따지고 이후 민간자격 관리에는 완전히 손을 놓고 있다.
직능원 민간자격정보서비스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운영되고 있는 민간자격은 총 1만5489개 기관에서 신청한 5만5216개에 달한다. 대부분은 실체 없는 자격증이다.
8일 기준 문체부 산하에 등록된 민간자격 1만8580개 중 응시·취득자가 0명인 ‘유령 자격증’이 1만7410개(93.65%)에 달했다. 이 중 지난해 100명 이상이 응시한 자격은 123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