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8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KYK 인비테이셔널 2024’. ‘배구 여제’ 김연경을 비롯한 V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팀 대한민국’과 ‘팀 코리아’로 나눠 국가대표 은퇴경기를 가진 뒤 국가대표 은퇴식이 열렸다. 이 행사를 준비한 김연경은 혼자 빛날 수 있었음에도 자신과 함께 대표팀에서 영광을 함께 한 9명의 선배 언니들, 친구(김수지), 후배(양효진)과 함께 합동 국가대표 은퇴식을 치렀다. 배구여제다운 배포와 품격, 포용이 빛난 명장면이었다.
이날 은퇴식에 참가한 12명 중 눈에 띄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인 2021년 11~12월, 이른바 ‘항명 파동’으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로 인해 비난의 중심에 섰던 김사니 전 IBK기업은행 코치였다. 현역 시절 한국 최고의 세터로 군림하며 김연경과 함께 2012 런던 4강 신화를 같이 이룩해냈던 김사니이기에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IBK기업은행 감독대행 사퇴 후 공식적인 배구 행사에 얼굴을 비친 것은 이날이 처음일 정도로 참여 자체가 큰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은퇴식 후 취재진과 참가자들 간의 공식 기자회견이 따로 준비되지 않았다. 이에 오랜만의 공식석상 등장에 대한 소감이나 소회를 듣기 위해 김 전 코치에게 따로 연락했다. 김 전 코치는 “아직은 부담스럽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꼭 인터뷰에 응하겠다. 꼭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흔히들 하는, “다음에 밥 한 번 먹자” 정도의 의례적인 멘트일 줄 알았지만, 김 전 코치는 지난달 초 2024 파리 올림픽 현장 취재에 한창이었던 본 기자에게 “이제는 인터뷰할 마음의 준비가 됐다”며 ‘진짜로’ 연락을 해왔다.
일정 조율 끝에 지난 4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세계일보 사옥에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자신의 유튜브 계정을 통해서 3년 전 있었던 ‘항명 파동’에 대한 해명은 했지만, 언론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참 사담을 나누다 “자, 이제 인터뷰 시작할게요”라고 말하자, 김 전 코치는 “인터뷰를 시작하겠다고 하니 갑자기 긴장감이 확 드네요.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요”라고 답했다. 현역 시절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했고, 해설위원 시절 무수히 생방송 카메라 앞에 섰던 그지만, 이번 인터뷰는 남다르게 다가온다고. 김 전 코치는 “사실 지난 밤 잠을 좀 설쳤을 정도에요. 예전 인터뷰는 ‘재미있게 하고 오자. 기사 실리겠다’ 이런 설레는 마음이었다면, 이번 인터뷰는 아무래도 조금은 무거운 마음이 크니까요”라면서 “‘그 일’ 이후에 제게 인터뷰하자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너무 감사한 마음에 인터뷰를 응하긴 했지만, 떨리기는 하네요”라고 말했다.
지인과 동업해 분당에 골프 스튜디오를 차려 사업가로 변신한 김사니지만, 그의 최근 근황은 배구였다. 그는 “‘그 일’ 이후에 배구를 한 시즌 정도는 안봤다. 죄책감 같은 것도 있고 해서 그냥 모르게 살고 싶었는데, 그 다음시즌부터는 자연스럽게 배구를 보게 되더라”라고 말했다.
V리그를 지켜보는 것을 넘어 김사니는 지도자로서의 준비 작업에 한창이다. 지도자 연수에 관심이 있었던 김사니는 지인의 소개를 통해 일본 리그의 효고현 고베시와 사가현 토스시를 연고로 하는 여자배구 팀인 히사미츠 스프링스에 단기로 세터 코치로 가게 됐다. 15일 일본으로 출국해 2주간 세터 코치를 하면서 일본 구단들의 훈련 시스템이나 팀 운영 등을 배우고 돌아올 예정이다. 그는 “히사미츠 팀에 세터가 3명 있다.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경기 영상들을 무수히 돌려보면서 분석하고 있다. 단순히 세터 코치뿐만 아니라 공을 때려줄 수 있냐는 요청도 받아서 요즘엔 공 때리는 연습도 하고 있다”면서 “한 3년 만에, 오랜만에 공을 때리려니 어깨가 너무 아프더라. 그래서 보강운동과 공 때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김사니의 당초 계획은 일본 구단들의 훈련 상황 등을 지켜보는 역할에만 머무르려 했으나 히사미츠 측에서는 ‘일본 배구단에 와서 뭐가 배우고 싶은지, 네가 알려줄 수 있는게 무엇인지, 통역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요청해왔다. 지켜보는 입장이 아닌 훈련 때 직접 가르치고, 선수단 미팅이나 분석 등 모든 활동에 참여하는 진짜 코치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김사니는 “그 팀의 세터들을 가르치기 위해선 정확한 의사 전달이 필요해서 통역도 제가 직접 고용해서 간다. 그 팀에서도 통역을 직접 고용하는 비용이 괜찮겠냐고 하지만, 배우기 위해선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면서 “2주간 가르치는 게 어떻게 보면 약간 오디션 성격도 띄고 있는 것 같다. 가서 제가 무엇을 그 팀에 공헌할 수 있는지를 지켜본 뒤에 다음 시즌엔 정식 코치로 고용될 수도 있고. 가능성은 열려있는 상황이라, 우선은 2주간 가서 최선을 다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세터 3명을 분석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살짝 감이 떨어진 느낌이다. 계속 영상을 돌려보니 이제 좀 보이긴 하는데...가서 잘 할 수 있을지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된다”고 덧붙였다.
김사니에겐 이번 세터 코치 연수가 약 3년간 끊고 지내야했던 배구라는 끈을 다시 잡은 계기가 된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그는 “지난 6월 국가대표 은퇴식 때 입장하는 계단을 걸어내려가기 전만 해도 다시는 배구장에 발을 못 디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 그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아, 다시 내가 배구장을 들어올 수 있구나, 다시 공을 만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대감 때문에 이번 코치 연수가 너무 기대가 된다”면서 “사실 준비하기 전만 해도 ‘나 배구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어. 다른 일을 할거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준비하면서 정말 행복하다.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내가 가장 행복해하는 것은 배구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다시 배구계로 돌아가 지도자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보다는 뭔가를 준비를 하는 게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아서 연수를 떠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돌아가겠다 등의 이런 그림은 전혀 정해진 게 없다. 그저 나를 위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으로 봐주셨으면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