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5년 10월12일 프랑스의 고등학교에 바이오 테러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 테러에 쓰이는 바이러스는 호흡기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패혈증을 유발한다. 프랑스군은 시민들을 빨리 대피시켜야 한다. 그런데 군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다.
미래의 세계에서 시민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믿고 싶은 것에 따라 ‘안전구역’을 만들 수 있다. 무언가를 보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당신의 세계에서 그것은 사라진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 거리에서 정육점을 보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런 세상은 가짜뉴스에 취약하다. 가짜뉴스 공격을 맞은 한 ‘안전구역’의 시민들은 대피시키려는 군대를 불신한다. 군인들은 어떻게 할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프랑스 국방부가 만든 레드팀 소속 공상과학(SF) 작가가 작성한 시나리오 ‘예고된 문화적 죽음의 연대기’의 내용 일부다. 프랑스는 2019년 레드팀 디펜스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레드팀은 SF 작가, 시나리오 작가, 그래픽 디자이너, 미래학자 등으로 구성됐다.
프랑스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위협을 상상해보고 2030~2060년 갈등을 낳을 수 있는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요소를 예상해보는 것이 이들의 임무다. 대담한 가설을 세우고 경계 없는 상상을 해보는 일은 기존 군사전략가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레드팀 디펜스 프로젝트에서 더 흥미로운 지점은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프랑스 국방부는 레드팀을 만들면서 블루팀, 퍼플팀, 블랙팀을 함께 구성했다. 블루팀은 프랑스군 분석가들로 구성돼 있다. 레드팀이 작업한 스토리를 블루팀에 제출하면 블루팀은 이를 토대로 군사적 분석을 한다. 두 팀은 서로 신사협정을 맺어 ‘창의’와 ‘분석’을 철저히 분리하고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다. 민간 군사 전문가들이 있는 퍼플팀은 레드팀에 전문 지식을 자문한다. 블랙팀은 프로젝트를 운영·관리하는 곳으로 레드팀을 선발하고 구성하는데, 국방부가 아니라 파리 과학·인문학대학(PSL)이 관할한다. SF 작가들이 마음껏 창의적 상상을 하게 하되, 전문성을 보완하면서 관료주의가 내용을 첨삭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구조다.
이창용 총재는 절간 한국은행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한국은행이 발간하는 이슈노트는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사회 문제에 제언을 한다. 한창 민감한 이슈를 직접 건드린다.
8월27일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 문제와 대응방안’에서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서 지역별 인구에 비례해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18일 ‘우리나라 물가 수준의 특징 및 시사점’에서는 과일과 채소를 수입해 가격 변동성을 낮춰야 한다고 했다. 사과 대란으로 한참 들썩했던 직후였다.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바로 반박했다. 3월5일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부담 완화 방안’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활용하되, 돌봄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낮게 차등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은 앞에서 처음으로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항의시위를 벌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 총재는 이에 대해 “여러 누적·심화된 구조적 문제 앞에서 우리 연구 영역을 통화정책 테두리 안에만 묶어둘 수 없다. 논쟁과 비난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하면 발전적 변화는 요원하다”고 설명한다.
이런 이 총재를 두고 자기 일이나 잘하라며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적잖다. 그런데 원래 혁신이란 엉뚱하고 시끄럽게 시작하는 법이다. SF 작가가 프랑스 국방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