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서 의원·각료로… 보수 진영의 자유주의자 [고인을 기리며]

남재희 前 노동부 장관

일간지 편집국장·주필 등 역임
정계 입문 후 4선 국회의원까지
장관 땐 노동계 요구 적극 수용

신문기자 출신으로 국회의원, 장관 등을 지내며 언론계, 정관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보수 정당의 리버럴리스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16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193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청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이승만정부 반대 운동을 주도한 탓에 공직은 어려울 것으로 여겨 고시를 포기하고 언론사 입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16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의 빈소에서 조문객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1958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뒤 조선일보로 옮겨 문화부장, 정치부장, 편집부국장 등을 거쳐 서울신문에서 편집국장, 주필 등을 역임했다.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총무도 지냈다. 고인은 한때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권 비판 기사로 서울 남산 기슭의 중정 청사로 연행돼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1978년엔 여당 공화당 공천으로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신군부가 집권한 뒤 여당 민정당 소속으로 11∼13대 의원에 내리 당선하면서 4선 중진으로 성장했다.

 

제5공화국의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1986년 고인이 참석한 자리에서 ‘국회 국방위 회식 사건’이 터졌다. 박희도 육군참모총장 등 대부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하나회 출신이었던 육군본부 수뇌부가 국방위 소속 의원들을 접대하는 회식에서 야당 의원과 장성들의 말다툼이 난투극으로 비화했다. 고인은 여당이었음에도 군 장성들을 질타했다가 되레 얼굴을 얻어맞고 크게 다쳤다. 군사정권 시절 군인들이 ‘국민대표’를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일로 육군 지휘부가 사과하고 몇몇 장성은 군복을 벗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1993년 김영삼정부 출범 후 노동부(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노동부를 이끄는 동안 노동계 요구를 받아들여 기존 ‘근로자의 날’(3월10일) 대신에 ‘노동절’(5월1일)을 부활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보수 진영에서 이의를 제기해 날짜는 국제적으로 노동절(메이데이) 행사를 치르는 5월1일로 하되 명칭은 계속 ‘근로자의 날’을 쓰기로 했다. 1994년 12월까지 약 1년간 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불법체류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서도 내국인과 동등하게 노동관계법을 적용토록 하는 등 유연한 정책을 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서가·다독가이면서 애주가로도 유명했던 고인은 ‘언론·정치 풍속사: 나의 문주 40년’,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 ‘진보 열전’ 등을 통해 언론·정치사의 이면을 다채롭게 복기하기도 했다. 1995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변문규씨와 딸 화숙·영숙·관숙·상숙씨, 사위 예종영·김동석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9일 오전 5시20분, 장지는 청주시 선영. (02)2227-7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