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을 켜고 차례를 지낸 건 평생 처음입니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이종혁(69)씨는 이번 추석 연휴 기간 기후변화를 절감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올여름에 사람들이 ‘덥다, 덥다’ 할 때도 ‘여름은 원래 더운 것이니 유난 떨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서늘한 기운이 돌아야 할 추석이 돼서도 날씨가 찌는 듯 더운 걸 보니 기후 문제가 심각하긴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추수를 앞두고 풍년을 기원하며 차례를 지내는 우리의 전통명절인 추석을 이례적인 가을 폭염이 덮쳤다. 연휴 기간 중 더위가 절정에 달했던 추석 당일(17일)에는 전국 곳곳에서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무더운 9월 날씨 기록이 속출했다.
18일 기상청에 따르면 추석 당일 경남에선 양산(36.1도), 진주(35.8도), 창원(35.6도), 경북은 구미(35.9도), 경주(36.2도), 전라권에선 전북 남원(35.8도)과 광주(35.7) 등이 9월 역대 최고 기온을 경신했다. 서울(34도)과 경기 안성(37.8도), 수원(33.9도), 인천(33.8도) 등 수도권에도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이어졌다. 이날 한낮 기온이 36도에 육박했던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오후 2시 시작된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하던 40여명이 두통 등 온열질환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낮 동안 오른 기온이 밤사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한반도 서쪽과 강원 내륙, 경상권, 제주도를 중심으로는 열대야 현상이 나타났다. 18일 오후부터 19일 오전 사이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을 기록한 서울·인천·대전 등은 ‘기상관측 이래 가장 늦은 열대야’ 기록을 또다시 갈아치웠다. 제주와 서귀포는 간밤을 포함해 올해 열대야일이 각각 72일과 65일로 늘어 연간 열대야 일수 1위 기록 경신 행진을 이어갔다.
연휴 마지막날인 18일에도 무더위가 계속됐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를 기해 경기 동두천·연천과 강원 철원·춘천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됐고, 서울(서남권 제외)과 인천(강화·옹진군 제외) 등 일부 지역에 내려졌던 폭염주의보는 경보로 격상됐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이날 전국 최고 체감온도는 33∼35도로 치솟았다.
추석 찜통더위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이례적인 일이다. 올해 추석이 양력으로 이른 편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그렇다. 기상청에 따르면 평년(1991∼2020년) 9월18일 지역별 최고기온은 19.5∼27.3도로 이날 최고기온보다 5∼7도 이상 낮았다.
늦더위의 기세는 20일 전국에 비가 내린 뒤에야 꺾일 전망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19일 수도권과 충청권, 남부지방, 제주도 중심으로 최고 체감온도가 33~35도를 기록하고 일부 지역에선 35도 이상으로 올라 매우 더울 전망이다. 이후 20일 전국 대부분 지역에 비가 내리며 더위가 가실 전망이다. 20일까지 예상 강수량은 수도권 30~80㎜(많은 곳 100㎜ 이상), 제주도 50~150㎜(많은 곳 중산간, 산지 200㎜ 이상) 등이다. 이어 21일 전국에, 22일 강원영동과 남부지방, 제주도에 비가 내리며 낮 기온은 21~29도 떨어지겠지만, 당분간 평년보다는 높은 기온 분포를 보일 전망이다.
다만 제14호 태풍 ‘풀라산’ 발달 정도와 진로 등 우리나라 주변 기압계 흐름에 따라 날씨는 변동 가능성이 있다. 15일 괌 서남서쪽 약 100㎞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 풀라산은 19일 오전 9시 중국 상하이 부근 해안에 상륙한 후 21일쯤 열대저압부로 소멸할 것으로 예보됐다.
한편 정부는 폭염·한파 등 기후위기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최근 연구 용역 입찰을 공고했다. 내년 10월까지 연구 결과를 도출해 관련 지표와 정책 개발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