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삶’ 찾는 베이비부머들 [편집인의 원픽]

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한 종편방송 프로그램 제목이 ‘끝사랑’이다. 50대 이상 시니어들의 ‘마지막 사랑’ 찾기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인데 한국인 평균 기대 수명 80대, 100세 인생도 놀랍지않은 고령화 사회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끝사랑’처럼 ‘끝’에서 ‘삶’을 찾는 이들도 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2차 베이비부머들의 얘기다. 1964∼1974년생인 2차 베이비부머 세대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8.6%를 차지하는 964만명으로 단일 세대 규모 중 가장 크다. 이들이 올해부터 법정은퇴연령(60세)에 진입하는 데 이들이 생산 현장을 떠날 경우 연간 경제성장률이 하락할 정도로 대한민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1000만명에 육박하는 2차 베이비부머 은퇴를 ‘쓰나미’에 비유하는 이유다. 

 

‘끝서 찾은 시작, 삶 다시 빛나다’(9월9일자·이지민 기자)기사는 2차 베이비부머 5인의 은퇴 이후 새 삶을 들여다봤다. 이들이 한 목소리로 꼽는 ‘일하는 이유’는 보람과 쓸모, 자존감 등이었다. 물론 경제적 이유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을 통해 얻는 게 ‘돈’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부모·자녀 부양에 노후준비 ‘무방비’(9월10일자·정재영·조희연·이규희 기자) ‘기업 18% “퇴직후 재고용” 10곳 중 4곳은 ‘정년연장’(11일자·이지민·이진경·안용성 기자) ‘인력난 덜고 노하우·연륜 살리고…은퇴인력 재고용, 노사 모두 ‘윈윈’’(12일자·채명준·이진경·박미영 기자·전국종합) 시리즈는 2차 베이비부머 은퇴 쓰나미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사회, 국가 모두의 문제라는 점을 짚고 있다.

 

법정 정년 연령인 60대 이후에도 일하는 고령층이 늘고 있다. 패션업체 젊은 사장(앤 해서웨이)이 70대 인턴(로버트 드니로)을 통해 삶과 일에 대해 배움을 얻는 내용의 2015년 할리우드 영화 ‘인턴’의 한 장면. 

◆“은퇴 후 일해야 산다”

 

최근 통계청 분석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층 취업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청년층(15~29세)을 앞섰다. 지난 2분기(4~6월) 65세 이상 취업자 수는 월평균 394만명으로 15~29세(380만7000명)보다 많았다.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89년 이후 처음이다. 이미 고령층 인구가 청년층을 추월한데다 노후 소득, 자존감 등을 위해 경제 일선에서 뛰려는 고령층 인구가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고령층 10명 가운데 7명은 현재 취업 상태든, 일을 하지않고 있든 계속 일하기를 원한다는 통계도 있다. 

 

중소기업 생산직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김민숙씨가 충북 충주 우진전장 공장에서 엘리베이터 인버터(부품) 조립을 하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교 제공

27년간 한식당을 운영하다가 2022년 중소기업 생산직에 취업한 김민숙씨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식당을 다시 해볼까 고민했지만 새로 인테리어를 하고 조리시설을 갖추는데 비용이 만만치않게 들어갈 것으로 봤다”며 “점점 나이는 드는데 투자한 돈을 제대로 회수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결국 취업하기로 마음먹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폴리텍대학 충주캠퍼스에서 신중년특화과정을 수료하며 생산직 취직을 준비했고 취업에 성공한 뒤 규칙적인 출퇴근과 보장된 급여에 만족한다고 했다.

 

기업의 퇴직 지원 제도를 활용하는 이들도 있다. KT 기술직으로 32년을 일한 유학성씨는 KT의 시니어컨설턴트 제도를 통해 재고용돼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 제도는 매년 정년퇴직자의 20%를 직무와 근무지를 유지하면서 계약직으로 일할 수 있게 한 것으로 기간은 최대 2년 보장된다. 유씨는 “대다수가 70살까지 일하고 싶어한다”면서 수십년간 일터에서 쌓은 경력이 사장되지않도록 정부가 이런 제도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 다양한 고령층 일자리 지원에 나서야한다고 밝혔다. 

 

◆공론화 접어든 정년연장 

 

고령층 일자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슈가 정년 연장이다. 법정 은퇴 연령은 60세지만 일부 회사에서는 노사 협의를 통해 정년을 연장하거나 재계약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일보 취재 결과 정년제를 운영하는 기업 10곳 중 6곳은 정년 연장 계획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이달 발간할 예정인 ‘정년제 계속고용제도 실태조사’에 따르면 5인 이상 사업체 3066곳을 표본 추출해 조사한 결과 59.6%가 정년 연장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정년 연장을 꺼리는 이유로는 인건비 부담 증가(27.0%), 사업장 업무와 고령자가 맞지 않아서(26.9%), 고령자의 생산성 하락(19.0%) 등을 꼽았다.

 

사내 지원 제도를 통해 계속 고용된 유학성씨가 후배 직원에게 무선액세스망운용 노하우를 알려주고 있다. 유학성씨 제공

실제 은퇴 인력을 재고용하는 사업장에서는 만족한다는 평을 내놓았다. 대개 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들이다. 대구의 침구제조 업체인 한빛침장은 현재 26명의 직원 가운데 50대 이상 직원이 70%에 달한다. 지난해부터 취업규칙을 변경해 은퇴 인력을 ‘촉탁계약직’으로 재고용하고 있다. 송상열 한빛침장 상무는 “고령 직원들 경력이 다들 30년 이상이라 젊은 친구들보다 일도 빠르고 부지런하셔서 회사 입장에서는 건강만 뒷받침된다면 계속 일하시기를 원한다”고 했다. SK하이닉스의 ‘HE(Honored Engineer) 제도‘, 삼성전자의 시니어 트랙 제도 등 은퇴 인력의 경험을 활용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정년 이후에도 사내 ‘교수’로 일하는 장혜준 현대엘리베이터 미래인재 아카데미 전문 교수는 “중장년 직원들도 오래된 경험에 따른 기술에 안주하지말고 새 기술, 방법을 적용하는 데 관심을 갖고 배우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1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하며 의료개혁과 연금개혁을 설명하고 있다. 조 장관은 “(연금)수급개시연령은 정년연장 문제와 함께 논의해야한다”고 밝혔다. 남정탁 기자

특히 정부가 국민연금 의무가입 기간을 59세에서 64세로 상향하는 내용의 연금개혁을 추진하면서 정년연장 논의도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이미 한국노총은 은퇴 이후 근로자들의 소득 공백을 줄이기 위해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정년연장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연금개혁 주무 장관인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도 최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연금수급개시연령은 63세고 정년은 60세이기 때문에 그 간격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정년이 연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간격을 더 벌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수급개시연령은 정년 연장과 같이 논의를 해야 한다”며 “복지부 홀로 해결할 수는 없고 여러 부처가 같이 머리를 맞대어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 여건 변화와 함께 해야 

 

우리나라보다 앞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이미 2000년부터 60세 정년을 맞은 근로자가 원할 경우 65세까지 일할 수 있도록 의무화했다. 메이지야스다생명의 경우 지난 7월 현행 65세 정년을 70세로 연장키로 했다. 도요타자동차는 20명 정도에 한해 예외적으로 적용하던 65세 이상 재고용을 모든 직원 대상으로 확대했다. 중국도 최근 남성 정년을 60세에서 63세로, 여성은 50∼55세에서 55∼58세로 각각 늘리는 방안을 발표했다. 앞서 미국과 영국은 정년 제도 자체를 폐지했으며 대만도 올해 7월 정년제도를 없앴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지난 6월 27일 종로구 경사노위에서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계속고용위원회’를 발족하고 첫 전체회의를 열었다. 당시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은 회의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는 노동시장과 국가 경제의 활력을 저하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노사정과 공익위원들이 머리를 맞대어 노사는 물론, 세대도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법적으로 정년을 늘리기에 앞서 고용 여건부터 달라져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당장 기업들이 고용 연장에 따른 추가 비용 부담을 떠안아야하는데다 젊은 층 고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 세대 갈등도 변수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에서 “청년층 일자리와의 관계를 고려하고 노사가 동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년 연장이) 추진될 필요가 있다”고 밝힌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측은 계속고용 제도 도입을 위해서는 임금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취업 규칙 변경 절차 개선 등 임금 체계 개편이 선행돼야한다는 입장이다.

 

전용호 인천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이전 세대보다 높은 학력 수준, 전문 지식을 갖추고 건강한 이들이 많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정년과 관계 없이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게 국가 경제성장에 유리하다”면서 “다만 고용 형태나 임금 체계는 기존 체계와는 다른 트랙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전 교수는 “기업의 부담은 줄여주면서 은퇴자는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해 상생할 수 있도록 임금피크제, 근무시간 단축 등 다양한 형태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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