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32명 중 30명이 의사…동료에 비수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복귀 전공의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비방한 이른바 ‘의료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경찰이 32명을 송치한 가운데, 이들 중 30명은 현직 의사인 것으로 확인됐다. 환자단체 등 시민들의 블랙리스트에 대한 비판이 크지만, 이를 유포한 전공의가 최근 구속된 데 대해 의료계에서는 되레 탄압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22일 국민의힘 조은희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은 올해 2월 전공의 집단이탈 이후 이달 19일까지 블랙리스트 사태 관련 45명을 조사하고 32명을 송치했다. 송치된 인원 중 30명은 의사, 나머지 2명은 의대생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이들에 대해 명예훼손, 모욕,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했다.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 및 의대생의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를 유포한 혐의를 받는 사직 전공의 A씨가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전공의가 구속된 첫 사례도 나왔다. 남천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달 20일 전공의 정모씨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한 뒤 증거인멸 염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올해 2월 의·정 갈등이 불거진 후 전공의가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씨는 올해 7월 전공의 집단이탈에 참여하지 않은 의사들의 신상 정보를 담은 리스트를 만들고 보안 메신저 ‘텔레그램’과 의료계 커뮤니티 ‘메디스태프’에 수차례 게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당초 정씨에게 개인정보보호법 등 혐의를 적용했으나, 정씨가 당사자 의사에 반해 개인정보를 온라인에 게재하는 등 지속·반복적인 괴롭힘 행위를 했다고 보고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의료계 블랙리스트가 처음 등장한 것은 3월이다. 메디스태프에 의료 현장을 떠나지 않은 전공의들의 신상이 ‘참의사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것이 시작이다. 이후 ‘복귀 의사 리스트’, ‘감사한 의사’ 명단 등이 추가로 유포되면서 의료 현장에 복귀하려는 전공의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의료계 블랙리스트. YTN 보도화면 캡처
의료계 블랙리스트. YTN 보도화면 캡처

최근 경찰은 추석 연휴를 앞두고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응급실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의사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아카이브(정보 기록소) 형식의 한 사이트에는 ‘응급실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응급실을 운영 중인 병원의 근무 인원과 근무자 명단이 공개된 바 있다.

 

응급실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 경찰은 이미 1명을 검찰에 송치한 상황이다. 아카이브 접속 링크를 게시한 3명에 대해선 스토킹처벌법 위반 방조 혐의로 입건해 수사하는 한편, 관련자들을 추적하고 있다.

 

조 의원은 “환자들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의료진을 위협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며 “의료 현장의 갈등이 증폭되지 않도록 의료진을 보호하는 한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료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계는 정씨가 구속되자 ‘인권 유린 규탄’ 집회를 열어 정부를 비판하고 정씨의 석방을 촉구했다. 의사들 사이에선 “정씨도 피해자이니 도와야 한다”는 정부 책임론이나 동정론마저 확산하고 있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지난 21일 서울 성북구 성북경찰서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공의 면회를 마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은 전날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정씨를 면회한 뒤 취재진에게 정씨를 ‘피해자’로 지칭하면서 “철창 안에 있는 전공의나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당한 전공의나 그 누구라도 돕겠다는 게 협회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임 회장은 “구속된 전공의와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입은 분들 모두가 정부가 만든 피해자”라며 “정부가 의사들 사이를 다 결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기도의사회는 같은 날 서울 이태원 인근에서 ‘전공의 구속 인권 유린 규탄’을 주제로 한 집회를 열고 “투쟁과 의사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 요소이고 이런 정도의 소극적 의사 표현조차 말살하는 것은 북한 수준의 인권 유린”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시의사회도 성명에서 “(블랙리스트 유포는) 정부의 초법적 조치에 대한 저항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앞에서는 대화를 청하면서 뒤로는 검경을 통해 겁박하는 것이 현 정부의 행태”라고 했다.

 

전라북도의사회는 성명서를 통해 “이는 명백한 표현의 자유 침해이며,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는 상황에서 구속은 법률이 정한 과잉 금지 원칙을 위반한 공권력 남용”이라면서 “사직 전공의의 구속을 강력히 규탄하며, 정부의 의료계 탄압 중단과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의료계에선 한때 블랙리스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정씨 구속을 기점으로 이마저도 수그러드는 분위기다.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강희경 서울대 의과대학·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15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의사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배포하시는 분들은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란다”고 비판했지만, 전날 정씨가 구속된 뒤에는 ‘의·정 갈등 첫 구속 사례’라고 표현한 기사를 언급하고 “의·정 갈등 첫 구속? 온라인 집단 괴롭힘 가해자의 구속이 아니고? 적법한 구속이기는 한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노환규 전 의협 회장도 전날 SNS에 “정씨의 행동은 그 취지가 마녀사냥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면서도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없는데도 구속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의사 커뮤니티에서도 구속된 정씨를 두둔하거나 그를 돕자는 취지의 글들이 잇따르고 있다.

 

정부는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헌신하는 의사들을 조롱하고 협박하는 것에 대해 참 안타깝다”고 밝힌 바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선의로 복귀한 의료진이 일을 못 하게 하는 의도가 불순한 것으로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라며 “국민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가므로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환자단체인 한국중증질환연합회도 최근 입장문을 통해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한 살인 모의와 무엇이 다르냐”고 비판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 작성과 유포는 환자를 선택한 의사를 집단으로 따돌리는 행위”라고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