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부리오가 총감독을 맡은 제15회 광주비엔날레가 지난 9월7일 ‘판소리, 모두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막을 올렸다. 본 전시와 더불어 광주 전역에서는 다양한 국가와 도시, 기관이 주체가 되어 마련한 총 31개의 파빌리온이 저마다의 관점을 담은 소주제 아래 특색 있는 전시를 선보인다. 그중 올해 신설된 ‘광주파빌리온’(안미희 전시감독, 박지형 큐레이터)은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에 주목하는 한편 지역 출신 작가들을 조명하기 위한 의도로서 기획됐다.
광주파빌리온 전시는 ‘무등: 고요한 긴장’이라는 명제 아래 “광주의 지역성과 지난 시간을 대변하는 핵심적인 단서로 ‘무등(無等)’의 가치 조명하기”를 목표 삼는다. “광주의 5월을 경험한 세대뿐만 아니라 이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 그리고 광주 밖의 무수한 공동체들과 연대 의식을 도모할 수 있는 공통의 기억이 될 수 있음을 주지”하고 “나아가 ‘무등’의 정신을 다채로운 높낮이의 신호로 변환하여 발송하는 기지국”으로서 역할하고자 한다는 설명이다.
전시의 핵심어인 ‘무등’은 광주의 문화적, 정신적 근간을 이루는 개념으로서 존재 간 귀천의 구분과 차등이 없는 절대적 선(善)의 경지를 가리킨다. 동시에 광주의 역사적 아픔을 목도하고 보듬어온 상징적 장소로서 무등산을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전시는 ‘혁신적 연대’, ‘창의적 저항’, ‘지속 가능한 정의’ 등 세 갈래로 분류된 구성에 따라 광주시립미술관 3, 4, 6관에서 진행된다. 김신윤주, 김웅현, 나현, 송필용, 안희정, 양지은, 오종태, 윤준영, 이강하, 이세현, 임수범, 장종완, 장한나, 정현준, 조정태, 최종운, 하승완, 함양아 등 18인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출품작 ‘골렘은 어디서나 살아 있어’(2023)는 중세 서사시와 유대 민속, 시편에서 사람의 모습을 한 자연적 존재로서 언급되는 ‘골렘(golem)’의 설화를 차용하여 그린 회화다. 거대한 은녹색 얼굴을 지닌 산기슭은 주체적 의식을 지닌 존재로서, 제 몸에 미지의 문명과 자연이 뒤엉킨 신화적 세계를 품고 있다.
임수범은 골렘이 “흔히 진흙 덩어리로 만든 인조인간으로 묘사되며, 히브리어로 ‘일정한 형식이나 모양이 없는 물질’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부연한다. 전해지는 설화 속에서 골렘은 “항상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명을 받아야 움직이는 존재”다. 작가는 그러한 골렘의 몸을 이루는 물질들이 모두 자연의 땅에서 비롯된 것임에 주목한다. “인간이 그로 하여금 생명을 지닌 것처럼 움직이게 만들기 이전에, 이미 그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을” 모든 자연의 물질과 비인간 존재들에 관한 생각이다. 화면은 자연을 대상화하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인지하기를 제안한다.
임수범은 1997년 광주에서 태어나 2022년 전북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간 상업화랑(2023)과 예술공간 집(2022)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호랑가시나무 글라스폴리곤 및 베이스폴리곤, 대전시립미술관 등이 연 단체전에 참여했다. 2022년 광주시립미술관 청년예술인지원센터에 입주해 작업하였으며 광주시립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등의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장종완의 양가적 낙원
장종완(41)은 사람에 의해 개간 및 개량된 자연의 모습으로부터 공상과학물의 허구적 이미지와 같이 낯선 생경함을 감각한다. 찬란한 초록의 화면 속 인물들의 얼굴은 꿀벌과 서양란 등 동식물의 형상으로 치환된다. 종교와 프로파간다 선전물을 연상시키는 구도 및 자세로서 구성된 목가적 풍경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평화에 깃든 역설적 불안과 긴장을 은연중 내비친다. 미지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예감하는 인류의 양가적 감정처럼 말이다.
‘킬리만자로의 선물’(2024)은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이자 만년설로 뒤덮인 평평한 봉우리를 지닌 킬리만자로의 풍경으로부터 초현실적 인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제작한 회화다. 스와힐리어 합성어로 ‘빛나는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킬리만자로의 만년설과 빙하는 2000년대 이후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
화면 상단부 신성한 상징처럼 묘사된 천사의 나팔꽃 중심의 꽃봉오리 하나가 박쥐를 잉태하듯 품은 가운데, 원경의 킬리만자로를 배경 삼아 지상의 근경에는 농경 도구를 손에 든 사람, 의료복을 입은 채 벌목된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사람, 오리와 다람쥐, 나뭇잎을 닮은 벌레 등 다양한 동식물의 형상이 보인다. 사실적인 필치로 섬세하게 묘사된 도상들은 비논리적 방식으로 배열되고 결합되어 역설적인 낙원의 풍경을 이루어낸다. 그의 낙원은 자연을 개간하는 인간 행위의 종말을 암시하는 비극적 예언인 한편 새롭게 정착할 미래 인류의 서식지에 관한 희극적 공상의 결과물이다.
장종완은 1983년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파운드리 서울(2023),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2020),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017), 금호미술관(2014), 스페이스 윌링앤딜링(2014) 등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아르코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트선재센터, 하이트컬렉션, 금호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등이 연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등 주요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 중이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