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창립을 주도한 함세웅(82) 신부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남북이 통일을 고집하지 말고 평화적인 두 개 국가로 가자’는 취지 발언에 비판적 입장을 내비쳤다.
함 신부는 23일 서울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열린 사제단 창립 50주년 기념미사에서 강론 도중 “북쪽에서 2민족 2국가를 얘기하니까 남쪽에서도 바꾸자고 하는데 저는 조금 불만이 있다”며 “6·15(남북)공동선언을 잘 간직해야 한다. 북한이 여러가지 이유로 2민족 2국가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게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6·15 남북 공동선언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한 최초 정상회담을 통해서 발표한 것으로, ‘남과 북이 힘을 합쳐 통일을 이뤄 나가자’는 게 골자다.
함 신부는 이어 “(지금은 남과 북이) 1민족 2국가가 됐지만 1민족을 끝까지 외쳐야 한다. 이게 선조들의 명령이고 시대의 명령”이라며 “6·15 남북공동선언을 현재화시키는 게 성숙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임 전 실장은 지난 19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기조연설을 통해 “통일하지 말고 (남북이) 함께 살며 서로 존중하고 같이 행복하면 좋지 않을까”라며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통일에 대한 지향과 가치만을 헌법에 남기고 모든 법과 제도, 정책에서 통일을 들어내자”며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국민의 상식과 국제법적 기준, 그리고 객관적인 한반도의 현실에 맞게 모든 것을 재정비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돼 있는 헌법 3조의 한반도 영토 조항 삭제 및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부 정리 등을 주장했다.
문규현(79) 신부의 주례로 열린 사제단 창립 50주년 기념미사 참석자들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며 정의를 실천하고 보여주겠다는 반성과 다짐의 시간을 가졌다. 사제단은 박정희정권 유신 시대인 1974년 창립됐다.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불씨가 됐다. 그해 9월26일,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300명 정도가 명동성당에 모여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시국선언’(제1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사제단은 그날을 창립 기념일로 삼고 있다.
사제단은 1975년 12월 ‘언론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기도회’를 열어 위정자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을 폭로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는 등 민주화 운동 고비마다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사제단은 이날 발표한 창립 50주년 성명서에서 “우리가 ‘제1시국 선언문’에서 천명했던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국민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확립’은 지금 짓다만 밥처럼 이도저도 아니게 돼 버렸다”며 “(과거) 애국청년학생, 노동자와 농민, 양심적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살벌하고 교활하고 악랄했던 독재 권력에 맞서 피눈물로 이룩한 성취가 시시각각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다시 한 번 민주의 이름으로 크게 일어설 때가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참에 세상을 치명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사회적 현상 하나를 말씀드린다”며 “그것은 종교가 공정을 외면하고 정의구현이라는 본연의 직무를 팽개치는 태만”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공정은 지상에 구현되어야 하는 하늘의 명령이고, 정의는 그것을 바르고 의롭게 펼치는 사람의 도리”라며 “이른바 ‘대붕괴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 교회마저 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외면한다면 사람들이 서러운 눈물을 어디서 닦겠나. 우리부터 사제단을 결성하던 때의 순수하고 절실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사제단은 윤석열정권에 대해선 ‘검찰독재’로 규정하며 강도 높게 비난하기도 했다. 성명에서 “밤낮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데 일로매진하는 검찰독재의 등장은 민주화 이후 우리가 무엇을 고쳐서 무엇을 창조해나갈 것인지, 그리하여 어떤 나라를 이룩할 것인지 그 목표와 의지가 흐릿해지면서 벌어진 변칙 사태”라며 “당장은 악이 승리하는 듯 보여도 오래 가지 못한다. 악인들은 풀과 같고 의인들은 나무와 같다. 불의의 기세에 놀라지도 눌리지도 말자”고 밝혔다.
사제단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자 당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 사건의 배후를 알리고 그가 이와 관련해 외부와 연락할 수 있도록 협력한 안유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과 전직 교도관 전병용씨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