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혁명 10년… 조용한 홍콩 [차이나우]

지난 22일 홍콩 센트럴 지역의 국제금융센터(IFC) 근처 도로. 비가 쏟아지자 행인들이 하나둘씩 우산을 펼쳐들었다.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페리 선착장에서 IFC 쇼핑몰까지 이어지는 긴 육교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주말 시간을 보내던 수백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헬퍼)들 자리 옆에도 사이사이로 들이치는 비를 피하기 위한 우산이 펴졌다.

홍콩의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이 지난 22일 홍콩 센트럴 국제금융센터(IFC) 근처 육교에 삼삼오오 모여 주말을 보내고 있다. 가운데 기둥에는 중국 건국 75주년을 축하한다는 홍보물이 붙었다. 홍콩=이우중 특파원

10년 전 이맘때도 우산이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적이 있지만 그 의미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2014년 9월 말 시작된 우산혁명과 이후의 시위들에서 홍콩 시민들이 펼쳐든 우산은 공안당국의 최루액을 막고 채증을 피하는 등 다양하게 쓰이며 시위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날의 우산은 원래 용도 그대로 비를 피하는 데만 사용됐다.

 

옛 명성을 다소 잃어가고 있다고는 하나 이번 홍콩 방문에서 처음 느낀 분위기는 ‘그래도 홍콩’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거리와 대형 쇼핑몰은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고, 밤을 밝히는 홍콩섬의 화려한 스카이라인도 여전했다.

 

다만 달라진 우산의 의미처럼 체류 기간 동안 이질감 역시 느껴졌다. 수년 전과 비교했을 때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크게 늘었고, 쇼핑몰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정작 개별 명품 매장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또 가는 곳마다 중국 건국 75주년을 축하한다는 붉은 현수막과 안내판이 시선을 끌었다.

지난 22일 영화 ‘중경삼림’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홍콩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의 기둥마다 중국 건국 75주년을 축하하는 붉은 홍보물이 붙어 있다. 홍콩=이우중 특파원

무엇보다 길을 묻거나 인터뷰를 요청할 때 다른 나라에 비해 친절한 편인 홍콩 시민들이 우산 혁명과 관련된 질문에는 굳게 입을 닫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었느냐는 듯.

 

◆조용한, 그리고 앞으로도 조용할 홍콩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문제를 계기로 2014년 우산혁명이 일어난 지 10년을 맞았지만 홍콩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과 ‘홍콩판 국가보안법’ 등을 둘러싼 2019년과 2020년의 대규모 시위에 이어 지난해까지만 해도 ‘조용한 저항’이 이어졌다는 전언이 있었지만 올해 3월 홍콩판 국가보안법으로 불리는 국가안전수호조례가 시행에 들어간 이후 상황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국가안전수호조례는 2020년 6월 중국이 직접 제정한 홍콩국가보안법을 보완하기 위해 홍콩기본법 23조를 바탕으로 홍콩 당국이 자체로 만든 것이다.

 

이날 만난 한 홍콩 교민은 2019년 시위 등에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참가했지만 지금은 아예 이런 시위를 엄두도 못 내고 있으며, 애초에 참여하려 해도 주체가 없다고 전했다. 그는 “나 같은 외국인도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중국 본토로 송환돼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며 “홍콩인 입장에서는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지금 분위기처럼 앞으로도 홍콩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우려는 기우가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홍콩에서는 지난 3월 홍콩판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이후 처음으로 징역형이 선고됐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홍콩 법원은 지난 19일 27세인 추카이퐁씨에 대해 홍콩기본법 23조의 선동 혐의를 적용해 징역 14개월을 선고했다.

 

추씨는 지난 6월12일 ‘광복홍콩 시대혁명’(光復香港 時代革命)이라는 문구가 쓰인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채 점심을 먹으러 가다 경찰에 체포됐다. 이 문구는 2019년 홍콩 반정부 시위 당시의 대표 구호로, 추씨는 홍콩이 영국 식민통치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믿음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문구의 티셔츠를 의도적으로 입었다고 밝혔다.

대만 총통 선거가 치러진 지난 1월13일 대만 타이베이의 민주진보당 당사 앞에 모인 군중 중 한 명이 ‘광복홍콩 시대혁명’ 문구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다. 타이베이=이우중 특파원

추씨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날 홍콩 법원은 전직 은행원에 대해서도 버스 좌석에 선동적인 문구를 적은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지난 6월 버스를 타고 가며 좌석에 ‘광복홍콩 시대혁명’ 등의 문구를 적은 혐의를 인정했다. 홍콩 법원은 이어 이날 페이스북, 유튜브, 엑스(X·옛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239개의 선동적 게시물을 올린 혐의로 아우킨와이씨에게 징역 14개월을 선고했다. AFP는 9월 현재 홍콩판 국가보안법으로 303명이 체포됐고 176명이 기소됐으며 16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전했다.

 

홍콩에서 나고 자란 30대 K씨는 이날 세계일보와 만나 “(시위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있거나 망명했고, 부자들은 재산을 싸들고 외국으로 이민했는데 더 이상 시위가 일어날 동력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홍콩인들 사이에서도 ‘홍콩인은 쉽게 잊어버린다’(香港人很善忘)거나 ‘따뜻한 물에 익어가는 개구리’(溫水煮蛙)라는 말이 회자된다”고 덧붙였다.

 

◆반중 감정 있지만… “곧 중국 될 것” 체념도

 

‘예의염치’(禮義廉恥)는 중국 춘추시대 ‘관포지교’의 주인공 관중이 지은 ‘관자’의 목민편에 나온다. 예절, 의리, 청렴,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를 뜻하며 홍콩에서 쓰는 광둥어로는 ‘라이, 이, 림, 치’라고 읽는다. 홍콩에서는 여기에 부끄러움을 뜻하는 ‘치’(恥)를 뺀 ‘라이 이 림’(禮義廉)을 홍콩 내 친중 정당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부른다. 간단히 말하면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K씨에게 전하니 그는 콧방귀를 뀌며 “그럼 그들에게 라이, 이, 림은 있다는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반중 정서가 읽히는 대목이다. 홍콩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되면서 최소 2047년까지 ‘일국양제’로 고도의 자치권을 약속받았지만 최근 빠르게 중국화하며 반중 감정이 깊어지고 있다.

 

한 홍콩 시민은 “옛날에는 돈 많은 중국인들이 홍콩에서 돈을 마구잡이로 쓰는 것을 보고 돈자랑을 하는 것 같아 아니꼽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없다”며 “홍콩에서 소비를 많이 하지 않는 중국 본토 단체 관광객들만 늘어나 홍콩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 몰려다니며 시끄럽게만 군다”고 토로했다. 실제 최근 경기 불황에 시달리는 중국에서는 ‘특공대식 여행’(特種兵旅遊)이 인기를 끌고 있다. 특공대식 여행은 짧은 기간에 최소 비용으로 많은 관광지를 둘러본다는 의미의 신조어로, 과거 홍콩 명품시장의 큰손이었던 중국인들은 줄어들고 홍콩의 비싼 물가를 피해 당일치기 여행 등에 나서는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중국 여행산업협회는 10월 초 국경절 연휴 기간 홍콩을 찾는 중국 본토 관광객 수가 전년 대비 10%가량 증가한 120만명 가량 될 것으로 내다봤지만 이 기간 홍콩 요식업 부문의 총 매출액은 지난해에 비해 오히려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2일 홍콩 구룡반도와 홍콩섬 등을 잇는 페리 선착장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와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함께 나부끼고 있다. 홍콩=이우중 특파원

이처럼 중국 관광객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지는 등 중국화가 빠르게 진행되면 애초 홍콩 반환을 결정하며 중국이 약속한 2047년보다 빠르게 일국양제가 종료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홍콩 공무원은 “향후 10년 정도면 일국양제는 사실상 종료돼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차이나우는 ‘중국’(차이나·China)과 ‘지금’(나우·Now)을 합친 제목입니다. 현지에서 중국의 최신 소식을 생생하고 심도있게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