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동의율 전쟁’으로 불린 1기 신도시 선도지구 공모가 이달 27일 접수를 마친 가운데 관계자들이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공모를 앞두고 공정한 경쟁을 외치며 ‘시장 주민소환’까지 외쳤던 단지별 재건축추진위원회들이 선정 결과가 발표되는 11월 이후 어떤 대응에 나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8일 각 지방자치단체에 따르면 선도지구는 ‘무늬만 신도시’로 전락한 경기 성남 분당과 고양 일산, 군포 산본, 안양 평촌, 부천 중동의 노후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주도하는 정비사업을 일컫는다. 최소 2만6000가구, 최대 3만9000가구를 지정해 신속하게 재건축 등 정비를 마친다는 내용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분당 8000가구, 일산 6000가구 등 2만6000가구 이상을 선도지구로 선정할 계획이다. 지자체별 상황에 따라 1∼2개 구역을 추가 지정할 수 있어 분당 1만2000가구, 일산 9000가구 등 3만9000가구까지 늘어날 수 있다.
마감일까지 성남·고양·안양·군포·부천시의 5개 지자체에선 치열한 눈치싸움이 전개됐다. 연초부터 선도지구 지정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관할 지자체들이 과열 양상을 가라앉히려 공문 등을 발송했지만 분위기를 되돌릴 수 없었다. 일부 단지에선 반대 주민들을 압박하거나 경쟁 재건축추진위원회를 비난하는 등 잡음까지 일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추후 어느 단지가 공모에 선정되든 재건축 분담금 등을 두고 또 다른 분쟁을 피할 수 없는 ‘승자의 독배’를 마실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 북한 최고인민회의 찬성률 99%…분당 재건축 동의율 최고 95.9%
독재국가인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투표율은 99%에 가깝다. 높은 참여율과 찬성률은 여전히 회자되곤 한다.
첫 재건축 단지 선정을 위해 이달 23∼27일 진행된 이번 공모에선 분당신도시의 한 재건축추진위(공동신청 단지)가 95.9%의 ‘주민 동의율’을 얻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분당의 경우 70%의 단지가 선도지구 공모에 지원했는데, 평균 주민 동의율은 90%를 웃돌았다.
수도권 1기 신도시 재건축의 물꼬를 트는 이번 공모에는 5개 지자체 아파트단지 가운데 60%가량이 ‘참전’했다. 분당을 제외한 다른 도시의 평균 동의율은 77∼86%로, 최대어로 꼽히던 분당신도시에서 얼마나 과도한 경쟁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재건축 수요가 가장 큰 만큼 공모 초기부터 30곳 안팎의 단지가 선도지구 경쟁에 뛰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기회를 잡지 않으면 재건축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너도나도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마다 주민 동의율에 목숨을 걸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선도지구는 100점 만점의 정량 평가로 진행된다. 배점의 가장 큰 항목은 주민 동의율이었다. 성남·고양·안양·군포시는 주민 동의율이 95%를 넘으면 해당 항목 만점인 60점을 준다. 부천시는 90%를 넘으면 만점 70점을 부여한다.
앞서 국토교통부는 △주민 동의율 △정주 환경 개선의 시급성 △통합 정비 참여 주택 단지 수 △도시기능 활성화 필요성 등 표준 평가 기준을 제시했는데, 지자체마다 지역 여건을 고려해 세부 기준과 배점이 조금씩 달려졌을 뿐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 단지는 한 장이라도 더 동의서를 받으려고 막판까지 안간힘을 썼다. 동의하지 않는 가구를 공개해 압박하는 곳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같은 동의율은 추후 지자체의 검증을 거치게 된다.
성남시 분당구의 한 재건축추진위 관계자는 “정부나 지자체의 배점표를 보면 예산 분담금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은 주지 않은 채 동의율만 끌어올리라고 주문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재건축추진위 관계자도 “주민들은 꽉 막혔던 재건축이 이번 정부에서 잠시 풀린 것으로 본다”며 “2025년 특별정비구역 지정이 마무리되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고 전했다.
위기감이 고조되자 앞선 추석 연휴에도 쉬지 않고 동의율 만회를 위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재건축추진위 관계자가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집주인을 찾아가 면담하거나, 해외 거주자에게 전화를 걸어 찬성을 종용하는 사례도 나왔다. 집이 팔린 세대의 새 주인은 잔금을 치르자마자 동의서를 내야 했고, 재건축에 반대하는 고령의 거주자들은 친분을 앞세운 동네 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전화 공세에 시달렸다.
아울러 엘리베이터 안에는 다른 동과 비교된 찬성 비율이 공개됐다. 빨간펜으로 적시된 ‘미동의’ 세대 수치는 암묵적으로 찬성을 압박했다. 일부 아파트단지 정문에는 ‘재건축에 반대하면 추후 새 아파트를 분양받지 못하고 감정가격으로 현금 청산된다’는 취지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다수 단지의 재건축추진위는 ‘일단 선도지구 지정부터 돼야 나중에 다시 찬반 투표를 거쳐 재건축 여부를 결정할 기회가 생긴다’는 취지의 설명을 주민에게 했다. 자신들의 단지만 집값 상승 기회에서 배제될 수 있다며 겁을 주는 곳도 있었다. 분당지역의 한 주민은 “찬성 세대를 중심으로 꾸려진 단톡방에 어느 날 ‘미동의’ 가구의 동·호수가 공개돼 깜짝 놀랐다”며 “찬성 세대 옆에는 ‘동의’ 표시를, 반대 세대 옆은 공란으로 남겨놔 누구라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이런 압박이 재건축에 반대 의사를 지닌 노인 등의 의사 결정권을 침해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들은 집값 상승, 주거환경 개선보다는 이주 등으로 5년 넘게 겪어야 할 불편을 꺼리는 상황이었다. 이들에게 해당 아파트단지의 재건축추진위와 지인들은 재산을 상속받을 자녀들에게 돌아갈 혜택을 강조하거나 동네 분위기를 전하며 찬성을 독촉했다.
결국 성남시는 이달 중순 아파트단지마다 공문을 보내 “자발적 참여 의사가 반영되도록 협조해달라”며 뒤늦게 진화에 나섰으나 소용이 없었다.
◆ 노인 “불편하니 반대”…재건축추진위 “상속받을 자녀 생각해야”
이른바 ‘깜깜이 재건축’에 대한 논란은 여진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개인 재산(지분)을 지자체에 내놓는 ‘공공기여’가 동의율 못잖게 중요 변수로 떠올랐지만, 향후 어느 정도 재산권을 침해받을지에 대해선 시뮬레이션을 거친 구체적 수치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단지별로 최저치로 책정된 재건축 분담금 예상 수치를 내놓거나, 이마저도 제시하지 않은 곳이 수두룩하다.
한 40대 재건축추진위 관계자는 “정부와 지자체가 분담금 등과 관련한 수치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향후 선정 단지에선 비용 부담이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깜깜이 재건축이 추진되면서 대다수 단지는 “일단 선도지구에 선정되고 나면 추후 분담금을 살펴보고 찬반 투표로 재건축 의사를 다시 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은 아닌 듯 보인다.
분당지역은 대다수 단지가 평가지표 가점(2점)을 얻기 위해 민간 재건축조합이 아닌 신탁사 시행 등을 택한 만큼 향후 주민투표에선 과반 찬성만 얻으면 그대로 재건축이 진행된다. 민간 조합 설립인가를 위한 동의율 기준 75%(개정안 70%)보다 크게 낮아 손쉽게 재건축 추진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분당의 경우 이번 공모에선 사업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양지마을, 시범 우성·현대, 샛별마을, 한솔 1·2·3단지, 파크타운, 아름마을 1~4단지, 시범2단지, 푸른마을, 서현효자촌 등의 동의율이 95%에 근접하거나 넘어선 것으로 전해지면서 동의율에선 변별력이 없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성남시의 경우 공공기여 5%(6점), 이주대책 지원 12%(2점), 장수명주택 인증(3점) 등을 내걸고 공공기여 추가 제공 1%에 1점씩을 더 주기로 하면서 재건축추진위는 사업성 훼손이라는 딜레마에도 직면했다.
이를 두고 주민 갈등이 표출된 곳도 등장했다. 한 단지는 공공기여 추가 제공을 두고 투표를 진행하려 했으나 주민들이 반발했다. 일부 단지는 서류 제출을 앞두고 급하게 공공기여 등을 포함한 내용의 온라인 투표로 진행해 빈축을 샀다. ‘이 정도는 해야 선정 가능성이 높다’거나 ‘이 정도 공공기여에 동의하지 않으면 사실상 탈락’이라는 식으로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과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재건축이 공공의 영역으로 넘어온 선도지구 선정은 비단 1기 신도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2027년 착공, 2030년 입주라는 정부의 이번 목표 역시 변수가 워낙 많아 사업이 지연될 것이란 전망이 벌써 나온다.
앞서 지난 7월에는 분당지역 52개 단지 연합회가 성명을 내 신상진 성남시장의 주민소환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당시 성남시가 내놓은 공모 지침에 상가동의율이 제외되면서 불공정 시비가 불거진 탓이다. 이들은 성남시가 유독 공공기여를 강조하면서 분담금이 늘고 사업성이 떨어졌다고 주장해 11월 선도지구 선정 이후 줄소송이 벌어지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분당의 한 재건축추진위 관계자는 “선도지구 지정 이후 가구마다 재건축을 위해 얼마나 돈을 더 내야 하느냐는 분담금을 두고 다툼이 불거질 것”이라며 “이번 선도지구 선정 단지들이 오히려 ‘승자의 독배’를 마실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