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지역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대표 A씨는 10년 전 인력소개업체를 통해 외국인 불법체류자 2명을 고용했다가 벌금 2100만원을 내고, 3년 고용 제한 제재를 받았다. 직원 60명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는 A씨는 “우리보다 더 열악한 데는 오죽하겠냐”며 제조업계 현장에서 처벌 위험에도 불법체류자를 고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29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행방이 묘연해진 필리핀 가사근로사 2명은 26일 고용부 서울강남지청에 이탈 신고됐다. 법무부의 출석 요구에 한 달 동안 회신이 없으면 이들은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다. 만약 사업주가 불법체류 중인 근로자를 고용하면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을 물게 되고, 3년간 E-9(비전문취업비자) 신청이 제한된다.
앞서 이들의 이탈 배경으로 제조업 근로자와의 임금 차이가 거론됐다. 고용부 관계자는 “제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받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도 좀 적게 받는다는 말씀들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제조업계 현장에서는 불법체류자 채용 적발 시 제재를 감수하고서라도 이들을 고용할 유인이 있다고 본다. A씨 말처럼 제때 생산을 못 할 때 입는 피해가 벌금 및 제재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필리핀 가사근로사 입장에서 제조업과의 임금 차이는 해결되지 못한 불만일 수 있다. 현재 가사근로사가 서울 강남에 있는 공동숙소에 월세로 38만∼49만원을 내고 나면 세전 200만원 초반 월급의 실수령액은 150만원 안팎으로 쪼그라든다. 경기 안산에 있는 전동기 부품 제조기업 B업체의 인사 담당 과장 C씨는 “특근을 채워 하는 외국인 근로자의 경우 월 320만원도 번다”며 필리핀 가사근로사와 임금이 2배가량 차이 나는 셈이라고 말했다.
가사관리사들이 투입한 매몰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서울시와 고용부는 입국한 100명의 가사관리사가 정부가 공인한 케어기버(Care giver·돌봄 도우미) 자격증 소지자라고 홍보했다. 이 자격증을 따려면 780시간 이상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교육비 2만페소(약 47만원)에 더해 교육을 위한 부대 비용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이 E-9 근로자로 입국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 탓에 일단 입국한 뒤 제조업체로 이탈을 계획했을 가능성이 있다. C씨는 “제조업 생산직 업무여서 선발할 때 성별뿐 아니라, 키, 체격 요건까지 확인한다”며 “간혹 제조업체라고 해도 손이 야무지고 꼼꼼하다는 이유로 여성을 뽑는 곳도 있지만 많지 않다”고 했다. 이어 “필리핀 가사근로사들에겐 이번이 한국에 입국할 큰 기회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국 여성이 E-9 비자를 받긴 쉽지 않지만, 일단 한국에 머무른다면 고용 가능성이 커진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고용부에 따르면 E-9 근로자 중 여성은 10명에 1명도 채 되지 않는다. 최근 5년간 E-9 근로자 근무 현황을 보면 2020년 18만1073명 중 여성은 1만3329명으로 7.4%였고, 이 비율은 2021년 7.4%, 2022년 7.5%, 2023년 8.0%를 기록했다. 올해 8월 기준으로는 26만7076명 중 8.5%인 2만2828명이 여성이다. E-9 업종은 제조업, 농축산업, 어업, 서비스업(음식점·호텔콘도) 등이다.
결국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임금 수준’이라는 근본 문제를 짚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시는 임금 불만은 크지 않다고 해명하고 있으나 제조업계 설명을 종합하면 ‘문제는 임금’이라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급여 지급 방식을 월급제에서 주급제로 바꾸겠다는 개선책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설명이다.
내년 외국인 가사관리사 1200명을 추가로 들여온다는 정부 정책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들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 필요하다는 견해이며, 정치권 일각에서도 이에 동의를 표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이번 일에 대해 “최저임금을 지급해도 이탈자가 발생하는데, 외국인 돌봄 노동자에게 최저임금도 지급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며 외국인 가사관리사 정책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