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에서는 패해도 전쟁은 승리할 수도 있는 게 배구다. 공격이나 상대 블로킹에 많이 잡히는 등의 경기 내용은 좋지 않아도 기본기에 충실하면서 어이없는 범실을 줄여 공짜로 주는 점수를 줄인다면 이길 수 있다.
여자 프로배구 ‘디펜딩 챔피언’ 현대건설과 지난 시즌 최하위 페퍼저축은행의 2024 통영·도드람컵 프로배구대회 조별리그 맞대결이 펼쳐진 29일 경상남도 통영체육관. 지난 시즌 순위는 천양지차지만, 이날만큼은 두 팀의 경기력은 대등했다. 아니 경기력은 페퍼저축은행이 위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아시아쿼터 트라이아웃에서 1순위로 페퍼저축은행에 합류한 196cm의 장신 미들 블로커 장위(중국)의 높이는 대단했다. 토종 최고의 미들 블로커로 꼽히는 현대건설 양효진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날 경기에서 보여준 코트에서의 지배력은 장위가 더 위였다. 장위는 이날 블로킹 6개 포함 14점을 올렸다. 그 큰 신장에서도 외발 공격을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발도 빨랐다. 물론 양효진의 현재 몸 상태가 100%가 아니었기에 양효진이 컨디션을 회복한 뒤에 맞대결 양상이 더욱 궁금해졌다.
지난 시즌 FA 최대어로 당시 보수상한선 최고액(7억7500만원)을 받고 페퍼저축은행으로 둥지를 옮긴 아웃사이드 히터 박정아도 예년의 몸놀림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187cm의 장신을 살려 상대 블로킹을 활용해 상대 수비의 사각에 떨어지게 만드는 특유의 스파이크는 물론 후위에서도 이따금 파이프 공격을 시도하며 확실히 달라졌음을 보여줬다. 이날 박정아는 팀 내 최다인 27점(공격 성공률 37.88%)을 기록하며 팀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1순위로 페퍼저축은행에 합류한 바르바라 자비치(크로아티아)도 성공률은 다소 떨어졌지만, 파워 넘치는 공격으로 향후 V리그에서의 맹활약을 예감케했다.
로테이션에서 자비치와 장위, 박정아가 함께 전위에 위치할 때면 그 높이가 주는 위용은 대단했다. 상대 세터로서는 어디에 줘야할지 난감할 정도의 ‘장신벽’이었다. 이날 페퍼저축은행은 블로킹 득점에서 18-10으로 현대건설을 압도했다. 범실도 페퍼저축은행이 23개로 24개의 현대건설보다 1개 더 적었다. 공격 성공률도 36.89%(현대건설)-35.13%(페퍼저축은행)으로 거의 대등했다.
이 정도면 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블로킹에서 열세를 보인 현대건설이 완패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 하지만, 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 경기 결과는 현대건설의 3-2(22-25 25-23 27-25 22-25 15-11) 승리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격수 간의 연결 동작이나 어택 커버 등 기본기에서 현대건설이 압도적으로 더 뛰어났다. 단적인 예가 3세트 듀스 승부에서였다. 현대건설이 26-25로 앞선 상황에서 현대건설 양효진의 공격을 자비치가 네트에 맞으며 수비가 됐다. 그러나 이후 연결 동작에서 이를 받아 올리지 못하고 점수를 헌납했다. 이 1점에 치열했던 3세트 승부의 승자가 현대건설이 됐다.
5세트에서도 10-8 접전 상황에서 김다인의 평범한 플로터 서브를 이예림이 그대로 상대 코트로 넘겨줬고, 이는 곧 양효진의 손쉬운 다이렉트 킬로 연결됐다. 곧이어 자비치의 공격을 위파이가 걷어올려 넘어간 공이 페퍼저축은행 선수 누구의 손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떨어졌다. 이 2점에 순식간에 12-8로 점수차가 벌여졌고, 그대로 승부는 현대건설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하나 더. 절대적 에이스의 존재감이 현대건설이 위였다.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 승리의 일등공신인 모마 바소코(카메룬)가 자비치와의 외국인 선수 맞대결에서 압승을 거뒀다. 2021~2022시즌부터 V리그에서 뛰기 시작해 어느덧 V리그 4년차를 맞이하는 모마는 자비치에게 ‘V리그에서 주포란 이렇게 해야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파워넘치는 스파이크로 현대건설의 공격을 이끌었다. 양효진의 공격력이 평소보다 다소 부진한 상황에서도 모마의 변함없는 상수와 같은 공격이 있었기에 현대건설은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점수를 낼 수 있었다. 이날 모마는 양팀 통틀어 최다인 34점(공격 성공률 42.50%)을 몰아치며 20점(31.15%)에 그친 자비치를 압도했다.
공수겸장의 아시아쿼터 아웃사이드 히터 위파이도 13점(43.33%)으로 팀 내 두 번째 득점을 올리면서도 코트 후방에서는 든든한 수비로 팀의 중심을 꽉 잡아줬다. 왜 현대건설이 모마와 위파이와 재계약을 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한 판이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페퍼저축은행은 희망을 볼 수 있는 한 판이었다. 창단 후 지난 세 시즌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던 페퍼저축은행은 디펜딩 챔피언을 상대로 풀 세트 접전을 펼치며 확실히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페퍼저축은행 새 사령탑 장소연 감독의 데뷔전의 결과는 패배였지만, 6개월 동안 확실히 팀을 달라지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페퍼저축은행에겐 충분한 소득이 있는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