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찾다가 부랑자로…본명도 모른채 진실규명 앞두고 숨져

희망소년원 피해자 김선기 씨, 진실화해위 결정 5일 전 사망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성장할 기회·행복추구권 박탈당해"
[진실화해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진짜 가족을 꼭 만나고 싶고 고향, 본적 등을 찾게 되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서울 희망소년원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김선기 씨는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여러 차례 이 같은 간절한 소망을 피력했다.



진실화해위는 김씨에 대한 인권침해를 인정해 지난 24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김씨가 '가족을 찾고 싶다'며 진실규명 신청을 한 지 2년 10개월 만이다.

하지만 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담낭암을 앓던 그는 진실규명 결정을 5일 앞둔 지난 19일 눈을 감았다.

김씨는 국민학교도 입학하기 전인 1955년 2월께 재가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전남 장성에서 홀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전쟁 상흔이 가시지 않은 혼돈의 시절이었다. 서울역 앞에서 헤매던 그는 경찰에 '부랑아'로 단속돼 서울 희망소년원에 강제수용됐다.

김씨는 제복을 입은 경찰들에게 납치되듯 끌려가 속옷만 입은 채 희망소년원에 버려졌다고 그날을 기억했다. 인적 사항을 묻거나 가족을 찾아주려는 이는 없었다.

희망소년원에서 먹을 것은 주로 멀건 콩나물국 정도였고 시설 경비들에게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비가 내린 뒤 산사태를 막기 위한 공사나 꽃밭을 만드는 작업에 강제동원됐다.

김씨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시설을 나가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고 도망도 쳤는데 걸리면 반 죽도록 맞아서 나중에는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번은 철조망을 뚫고 도망치다 붙잡혔고, 이후 평생 왼쪽 다리를 절뚝이게 됐다. 맞다가 부러진 왼쪽 넓적다리뼈가 잘못 붙어 장애를 갖게 된 것이다.

성인이 된 김씨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지인이었던 김상오 씨의 양자로 입적됐고 생년월일을 1949년 2월 2일로, 본적은 양부를 따라 '김해김씨'로 했다.

김씨 아들 김도진(50)씨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아버지는 호적에 올라야 해 김해김씨가 됐지만 실제로는 광산김씨라고 이야기하시곤 했다"며 "진짜 이름도, 정확한 나이도, 생일도 모르고 사셨다"고 말했다.

그런 김씨에게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잃어버린 가족뿐이었다.

[유족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도진 씨는 "형제가 여러 명 있었다고 하셨다"며 "남아있던 기억으로 형제들을 찾으려 관련 기관도 여럿 찾아가시고 하셨다"고 전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었던 만큼 자신이 꾸린 가족을 애틋하게 여겼다고 자식들은 회상했다.

딸 김희옥(52)씨는 "아빠가 저와 동생은 가족이라고 둘뿐이니 서로 사이좋게 보듬어주며 지내라고 늘 당부하셨다"고 했다. 김도진 씨도 "아버지는 정말 가정적이고 일밖에 모르셨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24일 열린 전체위원회에서 김씨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국가는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당시 보호자로부터 잠시 이탈된 김선기를 부랑아로 분류, 자의적으로 단속하고 시설에 강제수용해 가족 품에서 건전하게 성장할 기회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을 박탈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국가에 김씨에게 사과하고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김희옥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진실화해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며 "아버지 생전에 들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장례식장에도 저희 말고는 가족이 하나도 없어 눈물이 많이 났다"며 울먹였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