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2025년 증원' 받아들이나…전제조건 달았지만 긍정 변화

'2026년 감원 보장' 내걸면서도 '2025년 증원 백지화'서는 한발 물러서
복지장관 '전공의에 첫 사과'도 긍정 평가…의정대화에 한가닥 희망
'협의체·추계기구' 참여 거부 등 아직은 입장차 커…'꼼짝않는' 전공의도 변수

대통령실이 의사단체 추천 전문가가 절반 이상 참여하는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을 신설하겠다고 제안한 것에 대해 의료계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꽉 막혀 있던 의정 간 대화의 물꼬가 트일지 기대된다.

의협은 추계기구 참여에 '2026년 감원 보장'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2025년도 백지화'에 대해서는 포기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둬 대화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전국 병원 곳곳이 응급실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가운데 10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한 내원객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브리핑에서 전공의를 향해 "미안한 마음"이라며 사과 표현을 한 것도 우호적인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



의료계가 추계기구 참여라는 결단을 내린다면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여야의정협의체 구성에도 속도가 날 가능성이 크다.

다만, '2025년 증원 백지화'를 외치며 꼼짝하지 않고 있는 전공의들이 추계기구 참여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 의료계 "찬성"·"좋은 일"…연내 의사인력추계위 출범

1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의개특위) 산하에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를 신설할 계획이다. 의료계의 각 직역이 추천하는 전문가들이 절반 이상 참여한다.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는 간호사·의사·치과의사·한의사 등의 분과별 위원회로 구성되며, 각각 전문가 13명이 들어간다.

분과별 위원회 위원 가운데 7명은 각 직종의 관련 단체가 추천하고 나머지 6명은 환자단체, 소비자단체 등 수요자 추천 전문가 3명과 관련 연구기관 추천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다.

정부의 발표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이례적으로 우호적인 반응이 나왔다.

의료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를 신설하겠다는 취지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적정한 의사 수를 도출하기 위한 과학적인 추계기구 설치는 의료계에서 지속해서 요구했던 사안이기도 하다.

의협 관계자는 지난달 29일 연합뉴스에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는 의협이 계속 요구했던 것"이라며 "추계기구를 통한 논의에 찬성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의대 교수 단체인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관계자 역시 "의료계의 요청사항이 많이 받아들여진 것 같고, 의료계 추천 인사를 절반 이상 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좋은 일"이라며 "의료계가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의료계가 추계기구에 참여할지는 이달 중순에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오는 18일까지 위원 추천을 받아 연내 위원회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 2025년 대신 2026년 집중하는 의협…복지장관은 "미안한 마음" 첫 사과

의협은 지난달 30일에는 그간 주장해 온 '2025년도 증원 백지화'와 관련해 한걸음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오전 발표한 입장문에서는 정부에 사과와 문명한 입장변화를 촉구하면서도 그동안 반복해온 '2025년도 증원 백지화' 주장은 하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브리핑에서는 2025년 증원 백지화를 포기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치기도 했다.

최안나 의협 대변인은 "2025년도에 초래될 의대 교육의 파탄을 이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2026년도부터는 감원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장해 달라"고 말했다.

'2026년 감원 가능 보장'이라는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지만, 줄곧 주장해 온 '2025년도 증원 백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의협은 지금이라도 (재논의가) 가능하다고 보지만 정부에서 안 된다고 하지 않나. 그러면 내년도 7천500명 교육은 확정"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조규홍 복지장관이 환자와 환자 가족들을 향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전공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도 대화 가능성을 높게 한다.

조 장관은 지난달 30일 브리핑에서 "환자와 가족분들께 의료 이용에 많은 불편을 드리고 있는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필수의료에 헌신하기로 한 꿈을 잠시 접고 미래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전공의 여러분을 생각하면 매우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라고 했다.

만약 의료계가 추계기구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면 여당이 제기한 여야의정협의체 출범에도 속도가 날 가능성이 크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8월 26일 2026년도 의대 증원을 유예하자며 의료계에 대화를 촉구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의료계는 대화에 나서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은 의료계에 협의체 참여 여부를 지난달 27일까지 알려달라고 했지만 참여하겠다고 답변을 한 의사 단체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뉴스1

◇ '내년 증원 취소' 목소리 크지만, 사태장기화 부담…'수능 코앞' 현실론도

아직 대화론이 제대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의료계 내에서는 의료공백 사태가 장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출구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한 의사는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정책에 찬성하지 않지만, 대화를 통해 물러날 때를 찾을 필요도 있다. 마음 편히 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전공의나 의대생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월 말 전공의들의 집단이탈 이후 의료 공백 상황은 7개월 넘게 계속되고 있지만, 의료계가 정부를 향해 쓸 투쟁 카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전공의와 의대생의 이탈 이후 이미 의대 교수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의대 교수와 전공의들이 집단 휴진을 하기도 해 강경 카드는 대부분 사용했다.

이런 가운데 현장에 남은 의료진의 '번아웃'(탈진)은 심각한 상황이다. 일부 의대 교수들까지 이탈하면서 응급실과 배후진료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응급실 뺑뺑이'가 일상적인 뉴스가 됐다.

일부 의사들의 일탈 발언이 의사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키운 것도 부담이다.

의사·의대생 커뮤니티에서 일부 의대생들은 국민을 '개돼지', '조센징'으로 부르고 "(환자들이) 응급실을 돌다 죽어도 감흥 없다" 등 패륜 발언을 해 비판이 쇄도했다.

의료계는 대화를 촉구하는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 '2025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조건으로 내걸고 있지만, 이미 수시모집이 끝이 나고 11월 중순인 수능이 한달반 가량 앞으로 다가와 현실적으로 뒤집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실 앞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전공의 돌아올지 미지수…시민단체 "힘의 비중 균등하게" 우려도

대화를 여는 열쇠는 전공의에게 있어 보인다.

전공의들이 의료공백의 당사자인 만큼 전공의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의료계가 추계기구에 참여하고 의정대화가 시작돼도 수련병원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전공의들은 지난 2월 병원을 떠나며 제시한 7대 요구안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요구안에는 이번에 정부가 제시한 '과학적 의사 수급 추계 기구 설치'도 포함돼 있지만, 2025년도 의대증원 백지화를 의미하는 '의대증원 계획 및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전면 백지화'도 들어 있다.

전공의들의 이런 입장에 따라 의료계는 대화에 앞서 '우선' 현재 진행되는 의대 증원을 중단하는 게 먼저라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수급 추계기구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정부가 2025년 의대 증원을 백지화하지 않는다면 전공의나 의대생들이 복귀할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의료계의 중론이다.

의대 교수 단체인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관계자는 수급 추계기구와 관련해 "현재의 (의정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 같다"며 "추계기구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전공의나 의대생의 (미복귀)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가 과반 참여하는 수급 추계기구에 대해서는 그동안 특정 직역에서 입학 정원을 결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지적해온 시민단체가 우려하는 상황도 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국장은 "사회적 논의를 위한 테이블을 마련하고 여기에 공급자와 수요자, 전문가 등이 고루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며 "보건의료정책의 최종 결정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뤄져야 하므로 논의 과정에서도 힘의 비중을 균등하게 배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