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코 마주하는 감정·공간 선명하고도 끈질긴 묘사들 ‘나’를 중심으로 삶을 바라봐 삶의 의욕 보여주기에 적합
미야모토 데루 ‘환상의 빛’(‘환상의 빛’에 수록, 송태욱 옮김, 바다출판사)
유미코는 지금 바다에 면한 이층집 창가에 앉아 봄볕을 쬐면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따스한 햇살과 빛나는 바다 때문인지 “어쩐지 몸이 다시 꽃봉오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삐걱삐걱 오그라드는 것” 같다. 여기는 일 년 내내 해명(海鳴)이 울어대고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도 못할 만큼 바람이 강하게 부는 데다 한창 일할 사람들은 모두 도회지로 나가버린 쇠락한 바닷가 마을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바람도 파도도 그치고 모든 것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빛나 보인다. 이런 날은 몹시 드물어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어진 유미코는 그래서 잠시 창가에 앉아 있지만, 어김없이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전차가 오고 있는데도 그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 스스로 삶을 마친 남편을. 사랑하며 살았는데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그 실마리라도 이해하고 싶은 유미코에겐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어제, 저는 서른두 살이 되었습니다. 효고현 아마가사키에서 이곳 오쿠노토의 소소기라는 해변 마을로 시집온 지 만 삼 년이 되었으니 당신과 사별한 지도 그럭저럭 칠 년이나 되었네요.”
이 첫 단락만으로도 나, 유미코의 상황과 시간과 공간이 느껴지고 짐작하게 된다. 그렇게 유미코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되는데 틈틈이 초록색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닷소리가 들리고 해면에 닿는 환한 빛이 읽는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인물의 감정과 공간을 깊이 이해한 작가의 선명하고도 끈질긴 묘사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에 관해 설명하는 일은 부질없을지 모른다. 이 소설은 읽는 소설이 아니라 들어야 하는, 경청해야 하는 소설에 가깝지 않을까.
게다가 현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매일 그러하듯 오늘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뿐. 그 시간 사이로 남편을 사별한 후 허물처럼 살아왔던 유미코의 삶이 보인다. 어딜 가든 남편이 따라다니는 풍경에서 벗어나고 싶어 멀리 떨어진 이 마을의 남자와 재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뒷모습에 말을 걸고 붙들어도 보지만 자신을 돌아봐 주지도 않고 뿌리치기만 한다. 감정이 크게 북받친 날, 유미코는 재혼한 남편에게 처음 털어놓듯 묻는다. 전 남편이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잠자코 있던 남편이 불쑥 말한다.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라고.
그 밤, 유미코는 나란히 누운 남편과 아이들, 시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으며 알아차린다. 자신이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징조도 없이 삶을 버린 전 남편에 대한 분함과 슬픔 때문이었을 수 있다고. 강렬하고 뜨거운 그 감정들이 도리어 “위태롭게 시들어버릴 것 같은 자신을 지탱해왔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 유미코는 새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어제 서른두 살이 되었다고 시작한 오늘의 독백은 이 소설의 중심축이자 공간인 소소기 바닷가로 다시 돌아와 아름답게만 보이는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을 거라는 진술로 자연스럽게 하강한다. 그때 유미코에게 생활의 감각을 일깨우듯 아래층 툇마루에서 해를 쬐고 있던 시아버지가 큼큼 기침 소리를 낸다.
왜 많은 회상 소설들이 일인칭일까? ‘나’와 닿았던 수많은 타인을 통과한 지금, 그때와는 어느 정도 다르게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돼, 기신기신하게라도 일어서서 다시 살아보려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에 적합해서가 아닐까. 공간과 시간이 한정되고 집약된 소설의 특징은 인물의 다채로운 감정 변화에 있다는 점을 다시 배운다. 독자가 참여하게 하는 데도 감정이라는 것을. 기를 쓰고서라도 살아가려는 자의 행동처럼 보인 독백하기. 문득 내 인생의 그 일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이 하고 싶어질지 모른다. 뒤늦게 깨닫고 보게 된 어떤 빛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