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를 이용한 공중 전투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과거에는 속도나 선회 능력, 추력 등 전투기 기체의 성능에 따라 항공 작전에서 누가 우세를 차지하느냐가 결정됐다.
세계 최초로 제트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였던 6·25전쟁까지만 해도 전투기의 기계적 성능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이후부터는 전자장비를 탑재한 정밀유도무기 성능이 전투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늘어났다.
최근에는 이 같은 기조가 한층 강화되는 모양새다. 유도무기의 종류에 따라 전투기 성능도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노후화한 기체에 장거리 유도무기를 탑재,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는 사례가 등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투기에서 발사해 멀리 떨어져 있는 표적을 파괴하는 중장거리 미사일의 가치를 재인식시킨 계기가 되고 있다.
◆공대지 무기 위력 다시 부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에 대한 79억달러(약 10조4600억원) 규모의 안보 지원을 발표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타격력 강화를 위해 통합원거리무기(JSOW)를 제공키로 했다고 밝혔다.
F-16 등의 전투기에서 쓰이는 중거리 공대지 무기인 JSOW는 동력은 없지만, 사거리가 최대 130㎞에 이르는 무기다. 발사 직후 날개를 펼쳐 활공하면서 지상 목표에 접근, 타격한다.
미국의 이번 결정은 우크라이나가 전선 너머 내륙 지역에 있는 러시아군을 타격하고자 장거리 미사일 공급을 지속해서 요청한 것과 무관치 않다.
러시아군이 전선에서 압박을 강화하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 후방을 공격할 필요를 느끼고 서방에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지원을 요청했다.
우크라이나 전투기가 러시아군 방공망을 뚫고 표적까지 침투 비행해 공습하기는 쉽지 않다. 전투기들은 노후한 기종이 많고, 러시아군의 대공 방어망은 위협적 수준이다.
러시아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곳에서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을 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러시아 본토 공격은 어렵다고 해도 러시아군 점령지 내 표적을 타격, 러시아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이에 따라 영국이 공급한 무기가 스톰 섀도다. 최대 사거리가 560㎞(수출용은 250㎞)인 스톰 섀도는 전투기에서 발사되어 고도 30~40m의 저고도로 날아가 표적을 타격한다.
오차 반경이 1m로서 정밀도가 높고, 이동하는 표적도 공격할 수 있어서 이슬람국가(IS) 소탕전 등에서 쓰였다.
우크라이나에는 지난해부터 공급이 이뤄졌다. 우크라이나 공군은 수호이-24 전폭기와 정찰기 버전에 스톰 섀도를 장착했다. 이를 통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수호이-24 전폭기와 정찰기는 전략적 타격력을 갖춘 공중 플랫폼으로 거듭났다.
우크라이나는 스톰 섀도로 크름반도와 도네츠크, 루한스크 등의 러시아 점령지 내 표적을 공격했다. 러시아 흑해함대 사령부와 상륙함, 잠수함 등을 공격해 큰 피해를 줬다.
스톰 섀도가 위력을 발휘하자 프랑스도 스칼프 미사일을 보냈다. 독일에서도 타우러스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지원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강력한 위력을 지닌 폭탄을 공중에서 투하,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를 제거했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들이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의 헤즈볼라 본부를 공습, 하산 나스랄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폭탄 100개가 2초 간격으로 투하됐다.
이 가운데는 BLU-109도 포함됐다. 미국에서 만든 BLU-109는 2m 두께의 콘크리트 벽도 뚫는 폭탄이다.
목표물에 도달한 직후 내부로 파고든 뒤에 폭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졌거나 지하 깊은 곳에 숨겨져 방호력이 높은 벙커 등의 구조물을 파괴하는 데 쓰인다. 한국 공군도 운용 중이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기습공격 직후 미국에서 BLU-109 100개를 포함해 대량의 항공폭탄을 들여왔다. 하마스는 가자지구에 거미줄처럼 얽힌 땅굴과 지하벙커를 구축하고 있어서 지하 수십m를 파고드는 폭탄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일대에서는 레바논 정부군과 헤즈볼라, 하마스가 항공 및 방공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 공군의 활동 폭이 넓지만, 파괴해야 할 지하시설이 많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타격해야 할 지하시설이 거의 없지만 러시아군 방공망이 구축되어 있다.
장거리 미사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이스라엘은 지상 표적 인근까지 접근해서 고위력 항공폭탄을 투하하는 방식으로 공격, 파괴력을 극대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도 장거리 타격력 키우고 있어
한국도 먼 거리에서 표적을 타격하는 능력을 키우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산 S-300을 떠올리게 하는 신형 지대공미사일 체계를 개발하면서, 한국 공군 전투기들이 북한 지역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북한군 방공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안전하게 미사일을 발사, 표적을 타격하는 전술이 중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에 따라 한국 공군에도 전략적 타격력을 지닌 장거리 유도무기들이 잇따라 배치되는 모양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만든 KF-21 전투기에는 미티어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을 탑재한다.
유럽 MBDA가 개발한 미티어는 음속의 4배가 넘는 속도로 200㎞ 이상의 거리에 있는 공중 표적을 정밀타격한다. 빠른 속도와 높은 명중률은 적기가 미티어 미사일의 공격을 회피하는데 필요한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한다.
KF-21은 아시아 최초로 미티어를 장착, 장거리 공중전 능력을 한층 강화했다. 이는 북한과 주변국 공군의 위협을 KF-21이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500㎞ 떨어진 곳에 있는 지하벙커 등을 파괴할 수 있는 타우러스 장거리 공대지미사일도 F-15K에서 운용 중이다.
지난 1일 열린 국군의날 기념식에 모습을 드러낸 타우러스 미사일은 철근 콘크리트는 3m, 일반 지상 구조물은 8m 깊이까지 뚫고 들어가서 목표를 파괴한다.
지난 2016년 한국 공군에 처음 도입된 이후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는 한국형 3축 체계의 일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타우러스 미사일은 발사 직후 위성항법장치(GPS)와 관성항법장치(INS)를 통해 표적으로 유도된다. 마지막 단계에선 적외선 이미지 영상 등의 방식으로 표적을 타격한다. 적 레이더에 탐지될 확률이 낮아서 적군이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2007년에 들여온 미국산 슬램 이알(SLAM-ER) 공대지미사일은 사거리가 270㎞에 이른다. 지상 표적이나 군함을 공격하는데 쓰인다.
미사일이 표적 영상을 자동으로 전투기에 전송하면, 조종사는 이를 통해 미사일이 표적에 명중할 때까지 유도한다. F-15K에서 사용하며 지난 1일 국군의날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KF-21에 탑재할 국산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개발도 진행되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주도로 개발이 이뤄지고 있으며, 사거리 500㎞를 목표로 하고 있다.
단거리 공대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도 추진 중이다.
방위사업청은 지난해 12월 KF-21에 쓰일 단거리 공대공미사일을 국내 연구개발로 확보하는 단거리 공대공 유도탄-II 사업의 사업추진기본전략안을 심의·의결했다. 미국산 AIM-9X 최신형과 유사한 성능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년부터 2035년까지 진행될 이 사업을 통해 현재 KF-21에 탑재되는 독일산 아이리스-티(IRIS-T)를 대체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독자적인 항공무장을 확보하면서 KF-21 수출 시 독일 정부의 승인을 받는 것을 피하는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