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돌머리해변에서 ‘인생 노을’을 만나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함평 엑스포공원 추억공작소 60년대로 ‘타임슬립’/해보면 꽃무릇공원 주황색꽃 물결 장관/함평천지한우비빔밥 거리 맛집 즐비/돌머리해변엔 스카이워크와 어우러지는 저녁 노을 환상/10.18∼11.3 엑스포공원서 국화향기 가득한 2024 대한민국 국향대전이 펼쳐쳐

 

함평 돌머리해변 저녁 노을.

가시거리를 무한대로 펼친 투명한 가을 하늘과 하얀 구름까지 그대로 담는 바다. 그 위로 길게 놓인 알록달록 스카이워크를 연인이 손잡고 걷는다. 철 지난 해변의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며.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조개 캐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마저 잦아들면 이제 마법이 펼쳐질 시간. 푸르던 하늘과 바다를 온통 붉게 채색하며 떨어지는 붉은 태양은 마치 ‘빛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위대한 작품을 보는 듯하다. 함평 돌머리해변에서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기는 ‘인생노을’을 만났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60년대로 ‘타임슬립’ 추억공작소 가보셨나요

 

나비축제와 국향축제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 전남 함평군 엑스포공원으로 들어서자 빛바랜 녹색 전동차가 추억의 시간으로 이끈다. 한국 최초의 궤도 노선인 함평궤도를 오가던 협궤열차다. 1927년부터 호남선 학교역(현 함평역)과 함평군청을 연결하던 함평궤도는 오랫동안 주민들의 발이 돼 줬지만 적자에 시달리다 1960년 10월 문을 닫았다. 열차가 지나던 궤도 일부는 이제 국도가 돼 버스가 다니고 열차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함평천지 대황금박쥐.
오복포란.

열차 뒤쪽 추억공작소로 들어서자 유명한 ‘함평천지 대황금박쥐’가 여행자를 맞는다. 순금 162㎏으로 만든 진짜 황금박쥐다. 함평의 야산 동굴에서 1999년 황금박쥐 162마리가 발견된 것을 기념해 만들었는데 함평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금값이 오르면서 2008년 27억원이던 작품의 금값도 올해 약 16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박쥐 다섯 마리는 ‘오복’을 의미한다. 황금박쥐는 금광에서 발견돼 이런 이름을 얻었지만 공식명칭은 ‘붉은박쥐’ 또는 ‘오렌지윗수염박쥐’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화양근린공원에 설치돼 축제 기간에만 공개되던 황금박쥐는 지난 4월 제26회 함평나비대축제를 앞두고 추억공작소로 이전해 연중 내내 관람할 수 있게 됐다. 황금박쥐 뒤에는 ‘오복포란’도 보인다. 난생신화를 토대로 둥근 알의 형태로 우주탄생과 생명의 근원을 표현했다. 손을 넣어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니 알을 손에 직접 품어 보며 소원 하나 빌어본다.

 

함평 엑스포공원 조형물.
나비곤충생태관.

추억공작소는 학교면 학다리에서 농사를 짓는 1936년생 가상 인물 함기영씨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꾸몄다. 추억이 돋는 공간 22곳과 영상은 기억의 저 너머에 묻혀있는 시간을 깨워서 소환한다. ‘나라를 빛내는 국민이 되자’는 표어가 큼지막하게 걸린 함평국민학교로 들어서면 1960~1980년대 거리로 점프한다. ‘도나스 고로게’가 창문에 적힌 빵집은 교복 입은 학생들이 들락거리던 추억의 데이트 장소. 손불이발관을 지나 등장하는 나산대포집에선 고주망태가 된 청년이 제집인 듯, 드럼통 테이블을 베개 삼아 꿈나라를 헤맨다.

 

추억공작소.
추억공작소.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출산 제한 장려 포스터는 인구절벽 위기에 시달리는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당시의 출산 문화를 전한다. 만화영화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등 다양한 옛 영화 포스터도 만난다. ‘새나라학생사’에서는 옛 상품들을 판매하며 ‘함평다방’에서는 미디어 놀이체험과 차를 마실 수 있다. ‘함평극장’에서는 함평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나에게 오라’와 최초 상영작인 ‘자유 만세’를 관람할 수 있다.

 

꽃무릇공원.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해 슬픈 꽃무릇

 

언제 이리 폈을까. 함평군 해보면 꽃무릇공원으로 들어서자 산책길을 따라 긴 수술을 한껏 펼친 주황색꽃밭이 시작된다.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서자 산자락을 완전히 덮은 꽃무릇이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꽃무릇은 길어야 1~2주 정도 피었다 지는 꽃이라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처럼 만개했을 때 만났으니 운이 참 좋다. 올해 꽃무릇축제는 9월 12~15일 열렸는데 꽃이 피지 않아 애태우게 만들더니 뒤늦게 예년보다 몇 배나 화려하게 피어 여심을 홀린다.

 

꽃무릇공원.

꽃무릇과 상사화는 아주 화사하지만 꽃말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애절한 사랑, 슬픈 추억 등 애틋한 사연만 잔뜩 담고 있다. 둘 다 꽃과 잎이 절대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꽃무릇과 상사화는 구분하기 매우 어려운데 자세히 보면 좀 다르다. 상사화가 수술이 짧고 꽃잎은 더 큰 편이다. 또 여름에 피는 상사화는 잎이 지고 나야 꽃이 핀다. 반대로 가을에 피는 꽃무릇은 꽃이 먼저 피고 꽃이 말라 죽은 뒤에야 짙은 녹색의 잎이 돋아난다.

 

용천사 뒤편에는 다양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왕대밭과 차밭 사잇길, 대형 용분수대, 탐스럽게 매달린 조롱박과 단호박 터널, 정성스레 얹어진 항아리 탑,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쌓아 올린 돌탑, 1000번을 생각하는 명상의 숲, 전통야생화단지 등이 조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향대전.
대한민국 국향대전.

꽃무릇은 순식간에 왔다 사라지지만 가을을 상징하는 국화는 우리 곁에 오래 머문다. 18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엑스포공원에선 국화향기 가득한 2024 대한민국 국향대전이 펼쳐진다. 함평군과 함평축제관광재단이 진행하는 이 행사는 지역의 농특산품 판매를 돕고 관광을 활성하기 위해 마련한 축제로 2004년부터 시작됐다. 클래식과 버스킹 공연이 무대에 오르는 국향음악회와 국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리고 국화 분재 작품도 전시돼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대형 국화트리와 국화로 만든 9층탑도 전시된다. 

 

◆돌머리해변에서 만난 ‘인생노을’

 

함평에 왔으니 육회비빔밥을 놓칠 수 없다. 함평천지전통시장과 이웃한 함평천지한우비빔밥 거리로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식당마다 흘러나온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 정경복궁에 자리 잡았다. 주인장 이름이 ‘정경복’이라 이런 재미있는 식당 이름이 탄생했단다. 자리에 앉자마자 직원이 큼직한 그릇에 담긴 따뜻한 선지국을 내온다. 맑은 국물에 담긴 신선한 선지를 수저로 푹 떼어 입안에 밀어 넣자 비린내 하나 없는 고소한 맛에 미소가 입 꼬리에 걸린다. 일반 선지국과 달리 국물이 맑고 사골을 오래 우린 듯, 깊은 맛이 남다르다.

 

육회비빔밥.

육회비빔밥의 비주얼은 단순하다. 바닥에 고슬고슬 갓 지은 밥을 깔고 그 위에 콩나물, 호박, 부추, 김을 올린 뒤 육회와 깨소금으로 마무리했다. 쓱쓱 비벼 한입 떠 넣자 신선한 육회의 쫄깃쫄깃한 식감과 비강을 가득 채우는 고소함이 잠자던 미각세포를 단숨에 일깨운다. 단골들은 돼지비계를 곁들여 먹는데 함평의 오래된 전통이다. 함평 우시장이 전국에서 명성을 날리던 시절, 상인들은 시장이 파하면 돼지국밥으로 고된 하루를 달랬다. 그러다 돼지비빔밥이 생겨났고 부족한 고기 대신 비계를 넣어 먹기 시작했다. 한우 육회비빔밥에 돼지비계를 섞어 먹으면 고소함이 몇 배로 증폭된다.

 

돌머리해변 스카이워크.

넉넉하게 배를 채우고 함평 최고의 낙조를 만나러 돌머리해변으로 달려간다. 빨강, 초록, 노란색으로 칠한 스카이워크가 바로 돌머리해변의 뷰포인트.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간 다리 끝에 서면 마치 바다 위에 서 있는 느낌이다. 육지의 끝이 바위로 이뤄져 돌머리라는 이름을 얻었고 돌머리를 한자로 써서 마을 이름도 석두(石頭)가 됐다. 해변의 길이는 1㎞, 너비 70m로 바닷물이 맑고 수심이 얕아 물놀이하기 좋은 곳이다. 해변에는 울창한 곰솔숲이 둘러서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돌머리해변 스카이워크.
돌머리해변 저녁노을.

해가 조금씩 떨어지자 낭만 가득한 저녁노을을 즐기려는 연인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한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 아름다운 순간은 아주 짧다. 바다와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태양은 미처 즐길 겨를도 없어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돌머리해변의 노을은 이때부터가 진짜다. 해가 진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하늘과 바다를 파스텔톤으로 부드럽게 채색하는 풍경은 진한 감동으로 남는다. 눈 속에 오래오래 담고 마음에 꾹꾹 눌러 간직한다. 삶이 칙칙하고 마음에 모가 날 때마다 꺼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