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가 경기도를 뭐라 하는지 아니?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202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방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경기도의 가상도시 산포시에 사는 여주인공이 변두리에 사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무심코 내뱉은 이 대사는 지금까지 사람들 뇌리를 맴돌며 회자되고 있다.
당시 출마한 후보들은 대놓고 이 대사를 읊조렸다. 도백(道伯)에 당선된 김동연 지사는 경기 북부에 고속철, 남부에 반도체산업 유치를 내걸고 이른바 대개조에 나서기도 했다.
계란 흰자위를 벗어나기 위한 경기도의 몸부림에 속도가 붙으며 지역 교육계에선 과학고 유치라는 새 화두가 관심을 끌고 있다. 인구 1300만의 경기도에 단 한 곳밖에 없는 과학고를 추가로 개설해 교육 형평성을 맞추자는 이 움직임은 지역 정치·경제 환경과 맞물리며 폭발력을 지닌 이슈로 떠오른 상태다.
6일 지역 교육계 등에 따르면 도내 과학고 유치의 불씨는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이 댕겼다. 이명박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노련한 정치인답게 수도권 민심을 읽고 이를 건드린 것이다.
그가 쏘아 올린 과학고 추가 유치 이슈는 단박에 지역 여론을 사로잡았다. 임 교육감은 간담회 등에서 “경기지역 학생 수 등을 고려하면 과학고는 3~4곳이 적정한 수준”이라며 2∼3곳 추가 지정을 언급해왔다.
앞서 대학입시 제도 개선안을 교육부보다 먼저 내놓으며 발 빠르게 주도권을 확보했던 경험을 살려 발 빠르게 교육 이슈에 대처한 셈이다. 반면, 최종 인가권을 지닌 교육부에선 1∼2곳 추가 지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 임태희 경기교육감이 쏘아 올린 ‘이슈’…11월 말 예비 지정
과학고는 이공·자연계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된 특수목적고등학교를 일컫는다. 수학, 과학 등 자연·기초과학에 특화된 인재를 기른다는 목적에 따라 대부분 국가 예산으로 학생을 육성한다. 하지만 과학고, 영재고 같은 특목고에서 배출된 학생 가운데 적잖은 수가 애초 취지와 달리 의대입시에 몰리며 비판을 받고 있다.
역설적으로 과학고 출신의 의대 편중 현상은 지역 학부모들로부터 ‘긍정적’ 관심을 끌고 있다. 아울러 시·군 단체장이나 지역구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은 과학고를 유치할 경우 지역 발전과 우수 인재 유치, 교육적 위상 상승 외에 향후 선거에서 유불리를 가늠할 한 요인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사실 경기지역에서 과학고 유치가 주목받는 근본 원인은 ‘교육 불평등’이다. 인구 1367만(8월31일 기준)이 몰린 경기도는 대한민국 국민의 26.7%가 사는 곳이다. 반면 과학고는 단 1곳밖에 없다.
전국에 20개의 과학고가 있는데 경기도에는 2005년 의정부시에 개교한 경기북과학고가 유일하다. 이는 다른 지역과 비교돼 형평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서울(인구 935만·비율 18.3%), 부산(327만·6.4%), 경남(323만·6.3%), 인천(301만·5.9%), 경북(254만·5.0%)은 모두 과학고가 2곳씩 있다. 인구가 100만도 되지 않는 제주(67만·1.3%) 역시 경기도와 같은 1곳의 과학고를 갖고 있다.
지난 4월 도 교육청이 ‘경기형 과학고 구축 프로젝트’를 발표하자 도내 시·군마다 앞다퉈 유치 경쟁에 뛰어든 이유다. 지난달 11일에는 경기형 과학고 신규 지정 1단계 예비 지정 공모계획이 공개됐다. 학교와 교육지원청, 시·군, 지역기관이 협력해 특색을 살린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지역특화형 과학고를 육성하는 내용이다.
도 교육청은 신규 지정 평가 기준으로 △학교설립(40점) △학교운영(30점) △교육과정(30점)을 제시했다. 3개의 평가 항목은 신청 취지, 예산 확보, 용지 확보, 교육시설 확보, 교육과정 등 모두 20개 지표로 이뤄졌다.
다음 달 초까지 공모신청을 받고 별도 심사위원회를 꾸려 심사를 진행한 뒤 이르면 다음 달 말쯤 결과가 나온다. 기존 학교를 과학고로 ‘전환’하거나 새 학교를 ‘신설’할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신청 시·군은 이를 택일해야 한다. 전환 과학고는 2027년 3월, 신설 과학고는 2030년 3월 개교 예정이다.
도 교육청 관계자는 “경기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과학고 수요가 많고, 이공계 인재가 다른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추가 설립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용인·성남·화성·광명·이천·평택 등 유치전…서로 “우리가 최적”
당장 시·군 단체장들과 지역 국회의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나섰다. 지역 교육지원청, 학부모, 시민과 손잡고 간담회나 토론회를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고 유치에 관심을 표명한 도내 기초지자체는 12곳에 달한다. 용인·성남·화성·광명·이천·평택·고양·부천·안산·군포·시흥·과천이다. 도내 31곳 시·군 가운데 3분의 1을 훌쩍 넘겼다. 과학고가 있는 의정부를 제외하면 절반에 육박하는 수치다.
용인시는 일찌감치 지난 7월 이상일 시장과 지역 교육 관계자, 학부모 등이 참여하는 정책토론회를 열어 유치를 염원하는 학부모들과 의기투합했다. 학부모들은 유치 동의서 3180장을 모아 시에 전달하기도 했다. 용인시는 국내 반도체 경쟁력을 견인하는 핵심도시라는 점을 유치 당위성으로 꼽고 있다.
분당중앙고의 과학고 전환이라는 계획을 공개한 성남시는 이달 12일 신상진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시민 설명회를 열어 여론 결집에 나섰다.
광명시는 광명1구역의 중학교 용지를 후보지로 거론하며 분위기 쇄신에 들어갔다. 박승원 시장은 지난달 12일 연구·용역 착수 보고회를 주재하며 ‘교육 자족’을 강조했다. 그는 3기 신도시와 광명시흥테크노밸리 개발에 대비해 과학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는 점과 KTX 광명역과 함께 GTX-D, GTX-G 등 7개 신규 철도 노선 개통이 예정된 교통 중심지라는 점을 부각했다.
김경희 이천시장도 “과학고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했다. 도 교육청에 과학고 유치 희망서를 전달한 이천시는 지난달 2일 반도체의 고장에 과학고를 유치해야 한다며 시민 1000여명과 결의대회를 열었다. 최근에는 이웃 광주시로부터 “과학고 유치 최적지”라는 지지 의사까지 확보했다.
이 밖에 고양시(장항동 공공주택지구 유보지 확보), 부천시(부천고 전환) 등도 유치전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 지자체는 1000억원 상당의 통 큰 지원을 약속해 “경쟁이 과열 양상으로 치달았다”는 다른 지자체의 시샘 섞인 지적을 받았다. 과학고 설립을 위한 예산과 운영예산은 지자체의 몫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과학고 유치전에 뛰어들며 혼전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 8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화성 동탄과학고 유치를 위한 정책토론회는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 주최하며 이목을 끌었다. 좌장은 정치평론가인 이종훈씨였다.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과 화성시연구원 경제사회연구실 연구위원의 발제에 이은 토론에는 도 교육청과 교육지원청 장학사 등이 패널로 참여했다. 이 중에는 화성시의원도 포함됐다.
이 의원은 “(지역구인) 동탄은 삼성전자와 네덜란드 반도체장비업체인 ASML코리아 등과 연계가 가능해 과학고 최적의 입지”라고 주장했다.
앞서 7월에는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성남 분당을)이 과학고 유치를 위한 국회·행정·기업 3자 토론회를 열었고, 더불어민주당 이언주 의원(용인정), 김현정 의원(평택병) 등도 비슷한 성격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지역 여론도 달아오르고 있다. 한 이천시민은 “집권여당 3선 의원이자 경기도당위원장을 지낸 송석준 의원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시·군 단체장과 국회의원 등 여야 정치인들이 과학고 유치에 발 벗고 나선 데는 지역 발전 외에 의대입시 등에 강세를 지닌 과학고를 유치해 학부모 표심을 노린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로 인해 과학고 유치를 위한 물밑 작업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오히려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 與野 정치 이슈화에 우려 목소리…교사노조 “차별 심화·사교육 폭증”
지역 여론이 모두 과학고 유치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건 아니다. 교육·시민단체 등은 과학고 설립을 놓고 오히려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과학고 설립이 가지고 올 지역 내 교육격차 탓이다.
과학고 신설이 불평등과 경쟁을 부추기고 오히려 교육 편차를 키워 공교육 황폐화에 일조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권교육저지경기공대위’ 등 74개 교육·시민단체는 경기도교육청의 과학고 설립이 역차별을 초래한다며 임 교육감이 주장하는 ‘공평’이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특정 집단에만 적용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단체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경기지부와 경기교사노조, 경기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이 참여하고 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일부 정치인들은 특별한 소수를 위한 과학고 입시가 특정계층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도의회에선 “과학고 신규 지정에 앞서 지역 간 교육격차 해소와 공평한 교육권 보장이 우선 고려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는 국내 과학고 입시가 타고난 영재를 선발하기보다 초등학생 때부터 다양한 선행·특화교육 등 사교육을 거쳐 길러진 영재를 뽑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는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도내 교육계 관계자는 “해당 시·군에 과학고가 설립된다고 그 지역 학생들이 과학고에 많이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다”며 “경기북과학고의 경우 의정부 등 북부지역 학생보다, 이른바 ‘치맛바람’이 강한 성남·용인 등 남부지역 학생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