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선 우크라이나발 기차가 피곤한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역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많은 사람이 플랫폼 앞으로 천천히 몰려들었다. 마침내 기차가 플랫폼 앞에서 멈추자, 기차 안의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플랫폼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럽인들 역시 피켓을 높이 들고 환영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차로 원하는 장소까지 데려다주기도 했으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TV를 비롯해 언론 매체들은 전쟁 난민과 이들에 대한 환대 뉴스를 쏟아냈다. 아, 사람을 저렇게 구할 수 있는 것도 또 사람이구나. 그는 뉴스와 영상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라면 저렇게 전쟁 난민을 환대할 수 있을까. 피난을 온 저 사람들을 환대해주는 사람들의 힘은 무엇일까.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소설가 조해진은 다시 한 번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쟁의 무의미함과 그 속에서 꽃핀 사랑과 생명의 연대, 호위의 연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까. 생각해보니 이는 오래전에 썼던 단편 ‘빛의 호위’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빛의 호위’는 2013년 잡지에 발표됐고, 2017년에는 소설집으로도 출간됐다.
작품은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을 나눠 가진 권은과 승준이 각각 다큐멘터리 사진가와 잡지사 기자가 돼 재회한 뒤, 다시 7년이 지난 현재를 비추면서 전개된다. 승준은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임신부 나스차와 인터뷰를 하기로 하지만, 얼마 전 딸 지유를 낳은 아내 민영은 “갓 태어난 아이를 돌봐야 하는 동안만큼은” 좋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싶다며 나스차에 대한 이야기 듣기를 거부한다.
승준과의 인터뷰 이후 시리아에서 왼쪽 다리 절반을 잃은 권은은 자신이 닮고 싶었던 사진가 게리 앤더슨의 여동생 애나의 부탁을 받는다. 권은은 애나의 영국 집에서 게리의 아버지이자 젊은 시절 드레스덴 폭격작전을 수행했던 콜린의 삶을 되짚은 영상을 제작 편집한다.
버려진 듯 혼자 살던 12살 때 카메라를 선물로 주고받은 승준과 권은의 호의가 마침내 연결되고, 이것은 온기를 타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나스차와 애나, 옥사나와 라리사, 살마, 게리와 콜린, 알마 마이어와 노마 등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인연과 호의의 연대는 다시 승준, 권은에게로, 미래 세대에게로….
“레스보스섬에서 나는 죽어 있었다는 걸, 은도 알겠지? 그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어. 살아 있는 건 형벌 같았고 내일은 없었으니까. 그때…. 은이 나타났어. 은이 나를 애나에게 소개해준 것이 결과적으로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지만, 사실 은을 만나고부터 이미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어. 은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은과 산책을 하고 은 앞에서 울고, 그 과정이 형벌 같기만 했던 내 삶을 미래로 뻗어가게 했어. 공허가 아닌 미래로….”
삶이 빛이 깃드는 비범한 순간을 포착해온 조해진은 왜 전쟁의 포화가 가득한 빌어먹을 이 세상에서 인연과 호의의 태엽을 감아야 했을까. 그가 쏘아 올린 호의의 빛과 멜로디는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조 작가를 지난 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집필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저와 시대나 지역이 겹치지 않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저는 소속 기관이 없어서 전쟁지역을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분쟁지역을 활보하는 기자나 사진작가를 상상할 때는 책이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인물의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제가 가보지 않고 살아보지 않은 곳의 사람들을 쓰려면 핍진성을 더욱 추구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람을 죽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드레스덴 공습에 참여한 영국군 출신 콜린의 대사나, ‘나는 지금도 허공에 총을 쏜다’는 할머니 라리사의 대사 등은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한 노력 끝에 나온 대사들이다.”
―타자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권은과 게리의 사진 철학도 인상적인데.
“사진작가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인이 가져야 할 정신 같기도 하다. 기자는 팩트 위주로 쓰겠고, 저 같은 사람은 상상을 해 가공하는 일을 하고, 사진기자는 사진으로 표현하겠지만, 재현하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 저는 탈북 난민 등을 쓸 때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자기만족이나 작품을 위해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격이 있는지 방법이 맞는지 늘 회의하고 의심하면서 진심을 담아 인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왜 죽음이 아닌 삶의 방향성에 주목한 것인가.
“살고 싶다는 의지를 증여하는 순간을 쓰고 싶었다. 어떤 인물의 절망 순간을 쓰면서도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구원되고, 그 기억으로 또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서사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빛이 사람을 통과해서 영사기처럼 더 넓게 퍼져가는, 빛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1976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조해진은 2004년 중편소설 ‘여자에게 길을 묻다’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 등을,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 등을 발표했다. 신동엽문학상, 젊은작가상, 이효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느긋하게 일어난 뒤 우선 따뜻한 차부터 한 잔 마실 것이다. 마감이 급하지 않다면 책부터 읽고, 밥을 간단히 먹은 뒤에 서너 시간 정도 글을 쓴다. 마감을 한 뒤, 약속이 없다면 인근 공원에 나가서 7000보쯤 걷거나 요가를 한다. 밤에 와인을 한 잔 마시고 다시 책 속으로. 아니면 미처 마치지 못한 상상의 세계로.
몇 해 전부터 전업으로 글만 쓰고 있다는 소설가 조해진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의 일상과 글쓰기 루틴을 들려주었다. 결국 도시가 불온한 어둠으로 포위될 때면, 그는 다시 공감과 연민의 태엽을 감고 호의와 연대의 멜로디를 보낼 것이다. 어느 뒷골목에서 실패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나, 삶과 죽음이 갈리는 경계의 끝자락에서 서성이는 이들의 마음을 찾아서. 그리하여 어느 날엔 삶과 죽음이 선명히 갈리는 바그다드의 어느 병원에서 새 운명을 만나는 게리의 마음도….
“아기는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모르는 듯 그를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고, 그가 오른손 검지를 그 작은 손바닥에 올려놓았을 땐 아주 꼭, 있는 힘껏 꼭, 잡아주었다. 그 순간 그는 흐느꼈다.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은 아기의 손가락 언어가 그대로 전달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날 숙소로 돌아간 그는 두 가지를 결정했다. 언론사를 그만두는 것, 그리고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 죽음이 아니라 삶에 가까운 사진을 찍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