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연이어 도발적으로 정책 제기에 나서고 있다. 이창용 총재 취임 후 ‘시끄러운 한은’을 표방하며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교육 등 전방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보고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끄집어낸 데 이어 과감한 해결책까지 제시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총재는 직접 목소리를 내 이슈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자처한다. 절간에 비유됐던 ‘한은사(寺)’에서 벗어나 존재감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지난달 28일 진행한 ‘2025년도 신입 종합기획직원 채용’ 법학과목 필기시험에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과 관련한 헌법 문제를 냈다. 국내에서 보모 등으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대비 10%를 적게 주는 데 대해 헌법적인 측면에서 찬반을 논하라는 요지였다.
앞서 한은은 지난 3월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 보고서에 국내 돌봄서비스 인력난과 비용 증가를 완화하는 방안으로 외국인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주장을 담아 논란을 불렀었다.
외국인 노동자 최저임금 차등제와 관련해 법조계에서는 헌법 11조가 규정한 평등권 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이라는 의견이 다수다. 당초 한은도 보고서에서 ‘사적 계약’ 방식을 통해 근로기준법상 위법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대안을 내놓은 바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가사사용인’에 대한 예외조항이 있는데, 이를 적용해 사적 계약의 형태로 근무한다면 법적 근로자가 아니므로 최저임금법도 적용받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다.
한은 채용 시험에서 이러한 문제가 나온 건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도 이례적이라는 평이다. 그동안 헌법 과목은 대부분 약술형으로 출제돼 왔는데, 이번에는 시사성 있는 사례형 문제를 통해 배점 비중을 높이면서 법적 지식과 함께 한은의 최근 이슈에 대한 배경지식이 얼마나 있는지 평가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은은 그간 다른 법학과목에서도 사회적인 이슈보다 계약관계 등 법리를 중심으로 출제해왔다.
한은은 이번 문제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헌법소원을 제기할 시 청구인 적격(청구인이 소송을 제기할 법적 자격)이 있는지 논하라고도 요구해 제도가 현실화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문제를 검토하도록 했다.
2022년 4월 이 총재 취임 후 한은은 싱크탱크 역할을 강화하고 보고서를 통해 사회 이슈에 대한 파격적인 제안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지난 6월 한은이 높은 물가수준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산물 수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자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자처해 “(한은은) 농업 분야 전문가가 아니다”라고 반박했었다.
최근에는 대학 입시경쟁 과열을 막기 위해 상위권 대학이 성적순이 아닌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등 교육 문제까지 정조준했다. 관련 보고서 공개 후 이 총재는 국내 공식 석상은 물론이고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상위권 대학에서 서울 강남지역 고교 졸업생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며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게 할 과감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거듭 지적했다.
한은은 다양한 문제 제기를 통해 중앙은행으로서 위상을 높이고 국가 싱크탱크로 역할을 확대해 나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과 교수는 “한은이 질 높은 데이터를 활용해 구조개혁 등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확대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본다”고 했다.
한은 관계자는 “시험 문제는 출제자의 영역일 뿐 한은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다양한 이슈와 관련된 보고서들을 발간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게 도우면 중장기적으로는 구조개혁 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