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KDDX 사업 표류, 방사청의 결정 장애

건조업체 선정 두 달 넘게 늦어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 돌아가
공동·단독 개발 여부 속히 결단을
갈등 중재 못할 거면 간판 내려야

지난달 2일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 미 해군 군수지원함 월리 시라(Wally Schirra)호가 입항했다. 세계 최대 해군력을 보유한 미국이 함정 정비(MRO)를 위해 국내 조선소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화들짝했다. 20일 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세계 최대 조선소에서 중국에 맞설 동맹을 찾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한 번 더 놀랐다. 시장조사업체 모도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글로벌 해군 함정 MRO 시장 규모는 올해 577억6000만달러(약 78조원) 수준이다. 한국이 노리는 미국 시장 규모만 따져도 연간 약 20조원에 달한다. 70여년 전 미군 군수물자 지원으로 전쟁을 치렀던 우리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K방산의 글로벌 경쟁력을 국내 업계의 과열 경쟁이 갉아먹고 있어 걱정이다.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이 유독 그렇다. 2036년까지 6000t급 미니 이지스함 6척을 건조해 실전 배치하는 KDDX 사업비는 무려 7조8000억원에 달한다. 당초 일정대로라면 지난 7월까지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 사업자 선정을 끝내야 했다. 그러나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다툼에 사업주관 부처인 방위사업청이 결정을 미루면서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지난 3월 “정부가 소모적 갈등 중재에 나서야 한다”는 칼럼을 썼지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연내 사업자 선정이 가능할지도 불투명하다. 이를 의식한 방사청이 최근 KDDX 공동개발, 1·2번함 동시건조 등의 출구전략을 제시했다. 일종의 컨소시엄 형태다. 어느 한쪽을 밀어주기 난감하다는 인상이 역력하다. 기업이 사업 수주전에 사활을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장기간 상황을 조정·중재하지 못하는 방사청의 무능이 오히려 더 큰 문제다.

박병진 논설위원

방사청은 최근 미사일 방어시스템 천궁-Ⅱ의 이라크 수출을 놓고도 컨소시엄 관계인 LIG넥스원과 한화의 갈등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업계 내 진흙탕 싸움이 도를 넘으면서 한창 주가를 높이는 K방산이 더 성장할 호기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그뿐인가. 얼마 전에는 한국군의 경계 작전용 CC(폐쇄회로)TV 1300여대를 긴급 철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해당 CCTV 프로그램에는 영상 데이터를 중국 도메인 주소로 실시간 전송하는 악성 코드가 있었다.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군 경계 작전용 CCTV에서 악성 코드나 중국산 부품이 발견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2010년 이후 병력 부족으로 전방 철책 지역과 후방 해안·강안 지역에 대거 도입된 경계 작전용 CCTV는 오작동과 결함이 심각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국군 장비는 최소한의 작전요구성능(ROC)을 충족하면 가장 싼 값을 부르는 업체를 선정한다. 중국산 CCTV도 그랬다. 악순환과 잡음이 반복되는데도 방사청은 협상에 의한 계약체결 대신 최저가 낙찰 방식을 고집한다. 납품 사기와 국고 손실, 보안 문제, 작전 공백 등 후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엔 질끈 눈감는다. 올해 하반기 감시체계 구축사업도 같은 방식으로 추진한단다. 벌써 원성이 자자하다. 방위력 개선사업을 전담할 전문성과 사명감이 있는지 의문이다.

방사청은 2006년 참여정부가 군납비리 예방과 방위사업 효율성 제고를 위해 설립한 조직이다. 국가 방위력 증강의 핵심 기관으로 관련 사업을 관장하며 책임진다. 법적·행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배경이다. 방사청이 업체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하고 예산 문제를 핑계 삼아 결정 장애의 늪에 빠진 것은 직무 유기다. 존재 이유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KDDX 사업만 해도 사업 기간이 늘어날수록 대외 신인도 실추에다 수많은 연구기관과 협력업체에 지불해야 할 비용이 추가로 늘어난다.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된다. 사업 표류를 대수롭지 않게 볼 정도로 우리 안보 상황이 녹록지 않다. 언제까지 업체들끼리 싸우도록 놔둘 텐가. 방사청은 사업의 정당성이 확보된다면 서둘러 KDDX 사업자 선정에 나서야 한다. 그게 공동개발이든 아니든 간에. 더 미룬다면 간판을 떼야 한다는 각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