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승자의 저주’가 없습니다.”
9일 서울 종로구 본사에서 만난 박기덕 고려아연 대표이사 사장은 최근 고려아연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으로 제기되는 일각의 우려를 일축했다.
고려아연 인수합병(M&A)를 시도하는 영풍·MBK파트너스와 경영권 방어에 나선 고려아연이 벌이는 ‘머니 게임’ 규모가 6조원을 넘어서면서 누가 이기든 고려아연의 사업 동력이 크게 약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박 사장은 고려아연의 자사주 매입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박 사장은 “(머니 게임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부채 비율, 수년 내 (부채를) 해결할 수 있는 ‘체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사장은 그간 고려아연이 보여준 실적이 곧 증거라고 주장했다. 박 사장은 “경영학에서 한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따질 때 가장 대표적인 지표가 부채 비율이다. 부채 비율이 100%가 안 되면 상당히 우수한 재무제표를 가졌다고 본다”며 “고려아연의 현재 부채 비율은 20%대다. 향후 자사주 매입·소각까지 모두 고려해도 부채 비율은 불과 70%대”라고 말했다.
박 사장의 이런 발언은 사실상 이날 고려아연·영풍정밀 공개매수가 동결을 발표한 영풍·MBK를 향한 말이다. MBK는 이날 입장문에서 공개매수가 추가 인상은 두 회사의 재무구조에 부담을 줘서 기업가치가 훼손되기 때문에 동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여론의 화살을 경영권 수성에 나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에 돌린 것이다. 인터뷰 직전 발표된 MBK의 입장에 대한 질문에 박 사장은 “노코멘트”라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부채비율 전망치를 제시하며 적어도 최 회장 측의 경영권 방어로 회사가 어려워질 가능성은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고려아연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MBK의 동결 결정은)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를 포기하지 않고 오는 14일까지 공개매수를 유지해 투자자들에게 MBK의 공개매수에 응하라는 유인메시지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것은 시세조종 등 시장질서 교란행위로, (고려아연의) 적법하고 유효한 자기주식 공개매수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반발했다.
박 사장은 인터뷰 내내 고려아연의 경영권 방어, 적통성에 대한 확신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경영권 방어를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준비가 잘 돼 가고 있다”며 “(방어 성공을) 강하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현 경영진 외엔 고려아연의 정상적인 경영이 어렵느냐’는 질문에도 “현 경영진만 추진 가능하다고 강하게 믿는다”고 단언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뀌면 50년간 고려아연이 쌓은 노하우가 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박 사장은 “실질적으로 넓게 보면 비철금속 제련 기술은 범용 기술이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라면서도 “고려아연은 아연 하나만 뽑아내는 게 아니다. 연, 동, 금·은 등 여러 비철을 생산하는데, 그 과정이 모두 연결돼 있다. 그 유기적 결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최대 수익을 내기 위한 의사결정은 누군가 (외부에서) 들어와서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현재 고려아연은 글로벌 시장에서 아연, 연, 금, 은, 구리를 비롯한 비철금속 10여종을 연간 120만t씩 생산하는 세계 1위 기업이다.
고려아연이 비철제련업과 함께 추진 중인 신성장 동력 ‘트로이카 드라이브’(이차전지·신재생에너지·자원순환)도 마찬가지다. 박 사장은 “트로이카 드라이브는 생뚱맞게 생겨난 사업이 아니다. 비철제련업을 근간으로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사업을 선별한 것”이라며 “1974년 설립 이후 3대째 이어온 최씨 가문과 동고동락하며 개발한 노하우에서 비롯된 신사업인데 몇 년 공부한다고 사업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박 사장은 고려아연 경영권이 불안정해지면 다른 산업의 공급망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 사장은 “고려아연이 생산하는 소재들은 반도체, 자동차, 철강, 방산 등 우리나라 주요 산업의 핵심 소재”라며 “고려아연은 50년간 조용히 우리나라의 근간에서 버팀목이 돼왔다. 괜히 국가기간산업이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고순도 황산 공급망이다. 고순도 황산은 반도체 웨이퍼가 나왔을 때 미세먼지를 제거하는 세정제로, 반도체 생산에 없어선 안 되는 소재다. 박 사장은 “고려아연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필요로하는 반도체 황산량의 65%를 담당하고 있다. 반도체 황산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반도체 산업 자체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며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도 반도체 증산 계획을 세울 때 먼저 고려아연에 반도체 황산 캐파(생산능력) 확대가 가능한지 확인부터 한다”고 말했다. 고려아연은 현재 연간 24만t인 반도체 황산 캐파를 장기적으로 100만t까지 늘릴 계획이다.
박 사장은 이번 공개매수에서 주주들이 고려아연에 지지를 보내줄 것으로 확신했다. 그는 “올해 주주총회에서도 제안한 모든 안건에 대해 과반이 지지해줬다. 현 경영진을 다시 한 번 뽑아준 것”이라며 “지역사회부터 학계, 정부, 국회까지 많은 분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