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스포츠와 관련된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읽었다. 은퇴 스포츠기자들의 모임인 한국스포츠언론인회장을 지낸 이민우 선생의 저서 ‘정주영이 누구예요?’다. 이 책에는 한국 스포츠사의 비사가 소개되어 있다.
1982년 7월 초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청와대로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유치추진위원장으로 큰 역할을 했던 정 회장에게 대한체육회장을 맡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체육회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아무리 부자라도 대한체육회장은 맡지 못하겠다는 논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경기 단체장들을 기업체 장들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그러니 전경련 회장 하는 거나 다를 바 없잖습니까”라며 정 회장에게 대한체육회를 떠넘기다시피 맡겼다.
당시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경기단체는 예산이 많지 않았기에 기업 총수에게 ‘스포츠를 지원해 달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이후 레슬링협회장에 이건희 삼성 회장, 복싱연맹회장에 김승연 한화 회장, 축구협회장에 최순영 신동아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경기단체장을 맡았다고 기술돼 있다. 이는 우리 근대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다.
정 회장이 대한체육회장을 맡은 1982년부터 한국 스포츠는 약진했다. 그리고 19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뒤 2002 월드컵 축구대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하면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남아 있다. 스포츠를 통한 국제화가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때 각 종목 단체를 책임지고 맡아 발전시켰던 기업들은 지금도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축구와 양궁이다. 양궁은 지난여름 파리올림픽에서 우리 국민을 기쁘게 했다. 신동아그룹에 이어 축구협회를 맡은 현대는 2002 월드컵 4강 진출을 비롯해 10회 연속 월드컵 출전의 신기록을 세우면서 오늘의 한국축구를 있게 했다. 그러나 지난해 월드컵 16강 이후에 참가한 아시안컵에서 결승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지난달 23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과 홍명보 국가대표팀 감독이 국회로 불려 나가 혼쭐이 났다.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때에는 야구가 그랬다. 선동열 감독이 이끄는 야구는 당시 우승컵을 들었지만 예선에서 패한 죄(?)로 감독이 국회로 불려 갔다. 그때 호통치던 의원들은 지금 국회에 없다.
삼성이 손을 떼고 나간 레슬링과 배드민턴의 현주소를 보라. 정치인들은 이제 그만 스포츠인들을 국회로 불러 호통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백유 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 대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