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문학에 뿌려진 씨앗들 [심층기획-논픽션 한강 격류 제2화]

인생이란, 세상이란 빛나는 인연의 연쇄인가. 그래서 알 수 없거나 어찌해볼 수 없는 것투성이인가. 하마터면 세상의 빛을 미쳐 보지 못 할 뻔한 일만 해도 그렇다. 그가 뱃속에 들어가 있던 초여름, 어머니는 의사 장티푸스에 걸려서 끼니마다 약을 한 움큼씩 먹어야 했다. 건강을 회복한 어머니는 뱃속 아이를 지우러 가기도 했다. 위험하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선 뒤 어머니가 다시 병원을 찾지 않아서 그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 했지.” 어렸을 때 그가 여러 어른들로부터 가끔 들었던 이야기였다.

 

이 일을 두고, 한강은 “나에게 삶이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아슬아슬한 신기루처럼, 혹은 얇은 막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었다”(「문학적 자서전」)고 적었다.

 

그러니까 찬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1970년 11월27일 광주시 중흥동의 기찻길 옆 셋집에서 국어 교사이자 소설가인 아버지 한승원과 어머니 임감오 사이에서 2남1녀의 딸로 태어났다. 한강의 한자 이름은 韓江. 딸의 탯줄을 철길 옆 뚝방에 묻은 한승원은 “가장 쉬운 이름이 가장 좋은 이름”이라는 취지에서 한강으로 지었다. 오빠는 소설집 『유령』 등을 발표한 소설가 규호(필명은 한동림)씨, 남동생은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리는 강인씨.

 

한강(왼쪽 두번째)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한승원 작가 제공.

#“물이 넘치듯” 가난 넘어선 책들

 

어릴 때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아니 어려웠다. 가난은 입고 먹고 사는 곳으로 먼저 오는 것. 초등학생 한강은 한 반 정원 60명 가운데 급식비를 내지 못해서 도시락을 싸간 3명 중 한 명이었다. 이사도 자주 다녔다. 중흥동 한옥에서, 삼각동으로, 다시 풍향동으로…. 잦은 이사 때문에 그는 광주 시절 초등학교를 무려 다섯 군데나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가난에 대해 서글픔이나 원한을 느껴보지 못했다. 오히려 잘 웃는 아이였다고, 한강은 기억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가족의 울타리,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홉 살 즈음, 걸을 수 없을 만큼 고열이 오른 그를 업고 소아과로 달려가던 아버지의 땀 냄새, 횡단보도를 빠르게 건너던 아버지의 발소리, 햇빛이 밝은 어느 초여름 날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중흥동의 조그만 집에서 집안 청소를 하다가 벌어진 온 가족의 물장난…..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숨넘어가도록 웃으며 서로에게 물을 끼얹고, 그와 형제들 역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가서 소리 지르며 합세했다. 서로를 쫓아가고, 서로에게서 도망치고, 서로서로에게 물을 뿌리고, 모두 비명을 질러댔다. 마치 축제처럼.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는 “온통 부서지고 튀어 오르고 흩어지는 게 햇빛인지 웃음소린지, 눈부신 물줄기, 물방울들인지 알 수 없었다”고 그림처럼 기억했다.

 

“우리 형제들은 바가지를 들고 작은 화단에 물을 주고, 어머니는 시멘트가 얇게 발라진 마당에 양동이로 물을 부어가며 비질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호스로 커다란 적갈색 다라이에 물을 받고 있었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다 웃는가 싶더니, 어머니가 갑자기 양동이를 들고 가 아버지의 등에 물을 끼얹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 아버지는, 늘 지쳐 보이고 어렵기만 하던 아버지는, 화를 내는 대신 껄껄 웃으며 호스를 들고 어머니에게 물줄기를 쏘았다. 그 순간, 그것은 그에게 일종의 개벽이었다. 아! 어른들도 장난을 하는구나!”(「아버지가 지금, 책상 앞에 앉아 계신다」)

 

가난했지만, 그럼에도 집에는 늘 책이 많았다. “마치 물이 넘친 듯 쌓이고 꽂히고 널려” 있었다. 정리정돈 없이 책을 아무데나 내버려두는 분위기. 그는 자연스럽게 책을 펼쳐들고, 읽으며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종이 피아노」).

 

한강은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어두운 방에서 몽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독서란 상상으로 가는 직선 통로니까. 특히 열 살이 넘어서면서 자신의 생각에 빠지거나 상상을 부풀렸다고, 한승원은 전했다. “자기 세계 속에서 살고 공상을 많이 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찾아보면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자기 방에서 혼자 누워 공상을 하곤 했다. 그것이 소설가를 만들어간 자양분이 된 것 같다.”(김재선, 2016.5.17)

 

#“탁탁, 타다닥…” 소설가 아버지

 

탁탁, 타다닥, 드르륵…. 새벽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안방에서 타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잦은 이사에도 타자기 소리만은 꾸준하게 귀청을 때렸다. 자명종도 없이 매일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글을 썼다. 오전 여덟 시까지. 아버지는 낮에는 국어교사로 생활했지만, 새벽이면 어김없이 글 쓰는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 한승원은 1966년 단편소설 「가증스런 바다」로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2년 뒤 다시 단편소설 「목선」으로 대한일보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등단 소설가였다. 특히 1972년 동인회 ‘소설문학’을 조직하는 광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현역이었다.

 

어린 한강에게 아버지는 늘 잠이 부족해 피곤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새벽 집필을 마치고 토막잠을 붙이는 동안 그와 형제들은 조용조용히 생활해야 했다고, 한강은 기억했다.

 

“…우리 형제들이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을 때면, 어머니가 우리에게 수저 소리를 못내게 했다. 예민한 아버지가 숟가락 소리에 깰까봐 우리는 가만히 숟가락을 상에 놓고, 쉬쉬 귓속말을 얘기하며 가만히 밥을 털어 먹었다.”(「아버지가 지금, 책상 앞에 앉아 계신다」)

 

왜 늘 저렇게 피곤하실까. 인생은 꼭 저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어린 한강은 새벽부터 일어나 쉼 없이 피곤하게 글을 쓰는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어렸고, 세상의 현실에 온전히 발을 내딛고 있지 않을 때였으니까.

 

“고백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잘 이해했던 것 같지는 않다. 왜 늘 저렇게 피곤하실까. 인생은 꼭 저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막연히 그런 의문을, 때로는 불만을, 때로는 연민을 가졌을 뿐이었다.”(「아버지가 지금, 책상 앞에 앉아 계신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일찌감치 문학적 감수성에 눈을 떴다. 특히 한국문학과 선후배 작가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문예지를 읽었을 정도. 노벨문학상을 받을 때, 그는 선후배 작가들의 모든 노력과 힘이 영감이었다고 고백했다.

 

“내가 어릴 때 옛(old) 작가들은 집단적인(collective) 존재였고, 그들은 삶에서 의미를 찾고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결연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노력과 힘이 나의 영감이었다. 내게 영감이 된 몇몇 이름을 고른다는 것은 내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임지우, 2024.10.11.)

 

한강(왼쪽 두번째)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한승원 작가 제공.

#타자기 소리를 타고 들어온 것들

 

1980년 1월, 초등학교 5학년생 한강과 가족은 서울 도봉구 수유리로 이사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하기 얼마 전이었다. 아버지는 글만 쓰면서 새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상경했다. 전업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오히려 일찍 ‘철’이 들었다. 그래서 “반찬 투정을 한다거나, 군것질을 하기 위해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쓴다거나, 무슨 상표의 운동화를 신고 싶다며 조르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종이 피아노」)고, 그는 기억했다.

 

딱 한 번 부모를 조른 일이 있었다. 노래를 좋아하고 음악 시간에 리코더 불기를 좋아했던 그는 언젠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 서울로 막 이사 온 5학년 때에는 견디기 힘들어서 어머니에게 피아노학원을 보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아버지가 워드 프로세서를 들여놓았다. 타자기 소리가 집안에서 사라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여덟시까지 글을 썼다. 그는 이때 아버지로부터 쓰지 않는 타자기를 선물 받았다.

 

그는 타자기에 이면지를 넣고 자판을 두들겼다. 한 줄을 다 치면 땡, 하고 들려오는 소리의 감각. 탁탁, 타다닥, 드르륵, 땡. 마음 가는 대로 글자를 치는 것이 소일거리가 됐다. 소리를 타고 글자와, 단어와, 문장이…. 탁탁, 타다닥, 드르륵….

 

#사진첩이 던져준 삶의 비의

 

아버지가 조문을 하러 광주에 갔다가 터미널에서 파는 사진첩 한 권을 사서 가져왔다. 사진첩 안에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참상이 담겨 있었다. 어른들끼리 사진첩을 돌려본 뒤, 아버지는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뒤집어 꽃아 놓았다.

 

어른들이 평소처럼 부엌에 모여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1982년 어느 날, 그는 몰래 그 책을 펼쳐 들었다. 각종 자상이나 총상으로 숨진 사람들이 참혹한 시신들,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을 하려고 병원 앞에서 줄을 끝없이 서 있는 사람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고, 그는 기억했다.

 

“제가 광주 사진첩을 처음 본 게 12살, 13살 즈음이었는데, 그 사진첩에서 봤던 참혹한 시신들의 사진, 총상자들을 위해서 헌혈을 하려고 병원 앞에서 줄을 끝없이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 이 2개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거든요. 인간이란 것이 이토록 참혹하게 폭력적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집에 머물지 않고 나와서 피를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게 너무 양립할 수 없는 숙제 같았어요.”(정연욱. 2021.10.31.)

 

인간과 세상에 대한 비의가 비어져 나온 순간이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정말 다 죽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사람은 왜 다 죽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또 왜 아플까. 나는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고민은 깊어졌다. 혹시 책 속에 의문과 고민에 대한 대답이 있지 않을까. 고민으로 진지하게 책을 읽었다. 뜻도 모르지만,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럼에도 책에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을 주는 책은 없구나.

 

“다들 정말 훌륭하고, 나이 많은 분들이 쓰신 책이지만, 결론은 항상 이들도 나처럼 잘 모르고, 내가 고민하는 것들이 이들에게도 큰 고통이었단 거였어요. 우린 다 비슷하구나. 답은 없네.”(채널예스, 2011.12)

 

“영문과를 가도 소설을 쓸 수 있을 테니 기왕이면 영문과를 가라.” 대학 진학을 앞두고, 어머니는 그에게 영문과 진학을 권했다. 평소 강하게 주장하지 않던 부모였다. 하지만 그는 국문학과를 고집했다. 그의 마음에는 이미 소설과 시, 문학이 진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그건 소망이자 어떤 다짐 같은 것이었고, 그것은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제3화에 계속)

 

*참고문헌은 연재가 끝난 뒤 정리해 일괄 게시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