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 오가며 4명 돌보는데 전쟁기념관에서 쉬라고?”…필리핀 가사관리사 근무환경 열악

필리핀 가사관리사 절반, 하루 두 집 살림
이동에 최대 1시간35분인데 쉼터는 도서관
“근로여건 진단과 개선 위한 대책 필요”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추진하는 ‘외국인 가사관리사 사업’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가사관리사들의 절반은 하루 두 집에서 일하기 위해 장시간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들의 쉼터로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 일반 공공시설이 배정된 것으로 드러나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연합뉴스

 

1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한병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필리핀 가사관리사 98명 중 절반에 달하는 47명이 하루 두 곳의 가정에서 근무하기 위해 장시간 이동하고 있었다.

 

가사관리사 47명의 근무지 간 이동 거리를 ‘네이버 지도 대중교통 길 찾기’ 서비스를 통해 최단 시간으로 측정해 본 결과, 12명이 1시간 이상을 근무지 이동에 쓰는 것으로 확인됐다.

 

가장 긴 이동 시간은 95분으로 서울 송파구 거여동과 은평구 수색동을 오갔으며, 이어 88분(강서구 내발산동-강덕구 고덕동), 81분(양천구 신월동-강남구 삼성로), 78분(서초구 남부순환로-도봉구 창동)등의 순이었다.

 

47명 중 28명은 1시간 안팎을 근무지 이동에 쓰고 있었고, 근무지 간 이동에 30분 이내로 소요되는 경우는 7명에 그쳤다.

 

이들이 하루에 가정 두 곳을 전전하는 데에는 높은 임금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임금은 하루 8시간 전일제 근무를 기준으로 올해 최저임금을 적용한 월 206만 원 수준이다. 이용 가정에서 지불하는 금액은 238만 원이다. 30대 가구 중위소득(509만 원)의 절반에 가깝다 보니 너무 비싸다는 지적이 나왔고, 실제로 초기 신청 가구의 40%가량이 강남 3구에 몰렸다.

 

한 의원실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초 8시간 전일제 이용을 신청했다가 비용이 부담돼 파트타임만 이용하겠다고 시간을 바꾼 가정도 꽤 있었다”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가사관리사 서비스 개시 이후 중도 취소한 가정의 주요 취소 사유는 변심이나 시간 조정의 어려움 등이었다. 이에 따라 가사관리사 대부분은 일평균 2시간(월 60만 원)에서 4시간(월 119만 원)씩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많게는 4명의 아이를 한꺼번에 돌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사관리사들의 쉼터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왔다. 외국인 가사관리사 이용 가능 시설 현황에 따르면, 시가 제공하는 쉼터는 25개 자치구에 위치한 도서관이나 박물관, 미술관 등이었다. 전쟁기념관과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공공시설이 쉼터로 배정된 것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 연합뉴스

 

한병도 의원은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긴 시간 이동에 시달리는데도 서울시는 도서관이나 박물관, 미술관, 문화체육센터 같은 곳을 이들의 쉼터라고 안내한다”며 “사업이 충분한 준비 없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가사관리사의 근로 여건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함께 문제 개선을 위한 실효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더욱 문제”라면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 사업을 최초 제안하고 서울시도 이 사업의 운영주체로 참여하고 있는 만큼 책임 있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국인 가사관리사 사업은 지난달 3일 142개 가정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난달 말 기준 24개 가정은 이용을 중단했지만, 51개 가정이 새로 추가돼 현재 169개 가정이 이용하고 있다.

 

앞서 지난 8월 필리핀에서 입국한 100명의 가사관리사들은 4주간 160시간의 특화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됐다. 하지만 첫 급여일에 지급됐어야 할 교육수당이 제때 지급되지 않았으며, 가사관리사 2명이 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했다가 검거돼 강제 출국되는 등 논란이 일었다.

 

정부는 이번 시범 사업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내년 상반기까지 1200명 규모를 목표로 본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시범 사업 초반부터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잇따라 불거지자 노동계는 “졸속 행정에 따른 예견됐던 부작용”이라며 관련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