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 유훈’ 부정한 ‘두 국가론’… 주민 수용 가능성 고심한 듯

北, 헌법 개정 뒤늦은 공개 왜

그간 내부동요 우려되는 이념 변경 땐
급격한 변화 대신 점진적 추진에 방점
김일성 우상화 축소·태양절 격하 등도
거부감 없이 스며들게 공들이는 정황

육해공 영토 관련된 부분은 언급 안 해
통일부 “예단하지 않고 좀 더 지켜볼 것”
헌법 전문만 수정 ‘단계적 개헌’일 수도
노동신문에선 ‘주체연호’ 표기 사라져

북한이 17일 ‘적대적 두 국가론’을 헌법에 반영해 개헌했음을 시사했다. 최고인민회의 후 약 열흘 만이다. 정부는 북한의 헌법 개정 여부를 놓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모습이다. 정부는 북한의 이날 보도로 헌법 개정 사실을 알 수 있다면서도 국경이나 영토 부분에 대한 수정 여부는 좀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노동신문은 이날 경의·동해선 연결 도로를 폭파한 사실을 보도했다. 15일 있었던 폭파를 바로 보도하지 않고 이틀 후에 공개한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통상 주민들에게 알릴 사안은 당일 저녁 조선중앙TV 뉴스부터 반복 방영되고 다음 날 아침 노동신문에 실리는 경우가 많다. 내부적으로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지, 그간 말해온 북한 당국의 입장과 모순되지는 않는지 등 북한 당국 입장에서 그만큼 고민을 했다는 뜻일 수 있다.

DMZ에 철책 기둥 설치한 北 17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 지역에서 바라본 북한의 비무장지대 일대에 철책 기둥이 설치된 모습이 보이고 있다. 북한은 지난 9일 남북을 잇는 도로와 철길을 끊고 요새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후 임진강변 야산 일대에 군인들을 동원해 철책 기둥을 세웠다. 파주=뉴스1

북한은 이번 조치가 “공화국 헌법에 따른 합법적 조치”라고 표현했다. 지난 7, 8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 개정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통상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후 보도를 통해 어떤 법을 통과시켰는지,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정도를 보도하고 법안 전문을 그대로 공개하지는 않는다. 북한의 법이 내각 기관지에 실리고 주민들에 대한 교육 현장 등에 자료 형태로 하달되거나 서적으로 발간돼 중국으로 나오게 되면 우리 정보 당국이 이를 입수하는 식으로 법안 전문이 확인됐다. 이번 헌법 개정의 상세 내용도 확인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 있다.

 

이번 개헌에서는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는 내용을 새 조항으로 추가하거나 헌법 전문에 서술하는 정도의 개정을 했을 수 있다. 이른바 ‘단계적 개헌’ 중일 가능성이다. 육상과 해상, 영공 경계를 분명히 하는 영토 조항에 대해 북한이 발표하지 않은 가운데, 정부도 영토 조항 관련 판단은 보류하는 기류다. 북한은 주민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통치이념 등을 변경할 때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은 올해 초부터 본격화된 김일성 우상화 축소, 태양절(김일성 생일 기념 명절) 격하, 김정은 우상화 강화에 대해서도 북한 사회 내 거부감을 축소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정황이 포착됐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한국을 적대적 국가로 규정한 헌법 개정 가능성을 암시”했다면서도 “국경이라든지, 영토라든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예단하지 않고 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개정을 했는데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인지, 아직 손을 대고 있지 않은 것인지 판단할 만한 정보가 현재로써는 없다”고 했다. 앞서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은 12일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이 개헌 여부를 발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단 (개헌 자체를) 유보했다고 평가하는 게 적당하다”고 하기도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적대국가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한 것”이라며 “적대국가 명시 개정헌법 요약 또는 완성본 미공개는 과거 관례 측면도 있지만, 공개 시 서해국경선 분쟁화에 대한 부담, 국제법적 이슈화로 남북, 남북·중 분쟁으로의 격화 가능성에 대한 부담도 작용했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서해경계 분쟁화는 남측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잘 살아가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구상에 장애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군은 휴전선 일대 북한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북한은 15일 경의·동해선 남북 연결도로를 폭파한 이후 추가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성준 합동참모본부 공보실장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접적 지역 불모지 도로 건설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폭파 지역 도로 토사물을 제거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날 경의·동해선 단절 조치를 “남북 분리를 위한 단계별 실행의 일환”이라고 언급했다. 또 “남부국경 영구 요새화를 위한 조치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북한의 추가 작업이 예상된다. 우선 폭파 지역에는 북한이 공언한 요새화를 상징하는 구조물이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 서부전선 임진강 일대 주변에서는 지난주부터 북한군이 철책 기둥을 세우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철책 기둥 뒤로 산을 깎고 방호벽을 세웠다.

 

한편 북한의 ‘주체연호’가 노동신문에서 사라진 점도 이날 확인됐다. 북한은 1997년부터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주체연호와 태양절(김일성 생일) 규정을 만들어 전 사회적으로 보급했다.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주체 1년으로 해 서기 연도와 병기토록 한 것이다. 노동신문에 ‘주체 113년(2024)’ 표기는 13일부터는 ‘2024년’으로만 표기됐다. ‘김일성 지우기·김정은 띄우기’의 연장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