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적대적 두국가론을 헌법에 반영한 개헌을 했음을 시사했다. 최고인민회의 후 약 열흘만이다. 북한의 헌법 개정 여부를 놓고 정부는 오락가락하는 모습이다.
◆북, 하루 늦게 나온 보도
노동신문은 17일 동해·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폭파 사실을 보도했다. 15일 있었던 폭파를 바로 보도하지 않고 이틀 후에 공개한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통상 주민들에게 알릴 사안은 당일 저녁 조선중앙TV 뉴스부터 반복 방영되고 다음날 아침 노동신문에 실리는 경우가 많다. 내부적으로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지, 그간 말해온 북한 당국의 입장과 모순되지는 않는지 등 북한 당국 입장에서 그만큼 고민을 했다는 뜻일 수 있다.
북한은 이번 조치가 “공화국 헌법에 따른 합법적 조치”라고 표현해 지난 7∼8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 개정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영토조항을 추가했는지, 민족·통일 개념도 삭제했는지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통상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후 보도를 통해 어떤 법을 통과시켰는지,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정도를 보도하고 법안 전문을 그대로 공개하진 않았다. 북한의 법이 내각 기관지에 실리고 주민들에 대한 교육 현장 등에 자료 형태로 하달되거나 서적으로 발간돼 중국으로 나오게 되면 우리 정보 당국이 이를 입수하는 식으로 법안 전문이 확인되곤 했다. 이번 헌법 개정의 상세 내용도 확인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 있다.
북한이 ‘단계적 개헌’해나가는 것일 수 있을 수도 있다. 이번 개헌에서는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국가로 규정하는 내용을 헌법에 새 조항으로 추가하거나 헌법 전문에 서술하는 정도의 ‘소폭 개헌’을 했을 수 있다. 육상 경계와 영해, 영공 경계를 분명히 규정하는 영토 조항을 추가했을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정부도 보류하겠다는 기류다.
북한은 주민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이나 방향으로 통치이념 등을 변경할 때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은 올해 초부터 본격화된 김일성 우상화 축소, 태양절(김일성 생일 기념 명절) 격하, 김정은 우상화 강화에 대해서도 북한 사회 내 반발이나 거부감을 축소하며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정황이 계속 포착돼왔다.
특히 선대가 강조한 민족·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선대 우상화 축소, 김정은 우상화 강화’와도 밀접한 성격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근 연설에서 “예전에는 남녘 해방이라는 소리도 하고 무력통일이란 말도했지만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다”며 선대의 ‘적화통일’이라는 ‘사명’도 부정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한국을 적대적 국가로 규정한 헌법개정 가능성을 암시”했다면서도 “다른 여타 국경이라든지, 영토라든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예단하지 않고 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개정을 했는데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손을 대고 있지 않은 것인지 판단할 만한 정보가 현재로서는 없다”고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적대국가 헌법개정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한 것”이라며 “적대국가 명시 개정헌법의 요약 또는 완성본 미공개는 과거 관례 측면도 있지만, 공개시 서해국경선 분쟁화에 대한 부담, 국제법적 이슈화로 남북, 남북·중 분쟁으로 격화 가능성에 부담도 작용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서해국경선의 분쟁화는 남측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잘 살아가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구상에 장애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신원식은 안 했다고 했는데…
북한이 일단 개헌을 진행했음을 시사함에 따라, 닷새 전 안보 컨트롤타워의 발언은 틀린 것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신원식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12일 TV조선에 출연해 7, 8일 있었던 최고인민회의 후 개헌 여부를 북한이 발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단 (개헌 자체를) 유보했다고 평가하는 게 적당하다”고 한 바 있다. 신 실장은 “발표(개헌)해 놓고 비공개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낮다”며 “북한은 주민들이 (정권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당위성을 민족과 통일 개념을 앞세워서 찾았는데 그걸 대체할 논리를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 판단이 틀렸던 것 아닌가 묻자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이 (개헌을) 예고했는데 (외부에서)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 것 같다라고 하는 지적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고 (17일 보도에서 개헌을 시사하는 것을 통해) 사후 합리화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즉 개헌을 하지 않은 것이 맞는데, 사후에 했다고 주장 중인 것일 가능성까지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북한이 하지 않은 개헌을 했다고 대외에 거짓발표를 해놓고 나중에 조용히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개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상식적인 언급이 아니지만, 이 당국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정도로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북한이 경의·동해선 단절 조치가 “공화국의 주권행사 영역과 대한민국의 영토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단계별실행의 일환”이며 “페쇄된 남부국경을 영구적으로 요새화하기 위한 우리의 조치들은 계속 취해질 것”이라고 밝힘에 따라 향후 추가 초지들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당국자는 “콘크리트 벽을 만들고 있는 작업이 이어질 것으로 일단 추정한다”고 했다.
한편 북한이 김일성 생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연호’를 노동신문에서 미사용하고 있는 점도 확인됐다. 북한은 1997년부터 주체연호와 태양절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 보급해와다.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주체1년으로 해 서기연도와 병기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2일까지 존재했던 ‘주체113년(2024)’표기가 13일부터는 ‘2024년’으로만 표기됐다. ‘김일성 지우기·김정은 띄우기’의 연장으로 보인다.
통일부 당국자도 “올해 사실상 태양절 이름을 4·15로 대체했었고 김정은 독자 초상화가 나왔고 초상휘장도 나왔다”며 “노동신문에 주체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선대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 우상화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일거에 주체를 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고 아마 하나씩 바꿔 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