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이상’ 하니와, 제국주의가 부활시킨 1400년 전 무사 [특파원+]

◆공군 조종사 품에 안은 고대 일본무사

 

갑옷을 입은 무사가 쓰러진 비행기 조종사 차림의 병사를 품에 안고 있다. 무사는 전투를 독려하는 듯 칼을 치켜들고 소리를 지른다. 병사는 죽은 모양이다. 팔, 다리를 힘없이 늘어트렸다. 무사와 병사 뒤로 구름을 탄 또 다른 무사, 병사가 칼, 창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들고 있다. 

일본 후키야 고지 작품 ‘천병신조’(왼쪽)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사진=‘하니와와 토우의 근대’ 전시회 공식 SNS, 세계일보 자료사진

일본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하니와와 토우의 근대’ 전시회에 출품된 후키야 고지의 1943년작 ‘천병신조’(天兵神助)다. ‘천우신조’(天佑神助·하늘과 신이 돕는다)에서 ‘우’를 ‘병’으로 바꿔 단 제목이다. ‘하늘의 병사를 신이 돕는다’ 정도로 해석될 듯 싶다. 무사은 일본 고훈시대(3∼7세기)에 조성된 대형고분을 꾸몄던 ‘하니와’(埴輪)를 모티프로 했다. 눈동자 없이 휑한 눈, 목까지 덮은 투구, 몸을 가린 비늘갑옷, 그 아래 받쳐 입은 고대 복장으로 금방 알 수 있다. 그림이 그려진 게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3년이니 조종사 차림의 병사는 당시 일본 공군인 게 분명하다. 제국주의 일본이 1400년 전에 조성된 유물을 활용해 전쟁을 미화, 독려하던 당대의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하니와 ‘비늘갑옷을 입은 무인’ 사진=e국보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하니와와 토우의 근대’ 전시회 전시장 모습.  사진=강구열 특파원

◆“일본인 마음, 이상의 원류”

 

고훈시대 일본 열도에는 철기 보급이 확대됐다. 벼농사도 발달해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계급이 생겼다. 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근 형태의 대형 무덤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은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하니와는 그 무덤 주변에 세웠던 흙인형이다. 무사를 비롯해 사람, 동물, 집 등 형태가 다양하다. 일본 열도에서 문명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의 생활상, 복식 등을 보여주는 시각 자료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일본서기’, ‘고사기’ 등 역사서에 기록된 신화를 이미지화하는 재료다. 국립근대미술관은 “근대국가 ‘일본’의 형성과정에서 하니와는 ‘만세일계’(萬世一系·온 세상이 일왕의 한 핏줄) 역사의 상징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일본인의 마음, 이상의 원류로 간주됐다. 태평양전쟁 당시 “전의를 고양하고 군국주의을 교육하는 데” 하니와가 적극적으로 활용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도쿄국립박물관 하니와 전시 모습. 사진=강구열 특파원

◆‘피에타’ 빌린 하니와 그림, 죽음의 신성화

 

태평양 전쟁 전부터 하니와는 일본의 상징으로 종종 활용됐다. 1907년에 그린 한 그림은 초대 일왕 진무(神武)를 도와 각지의 호족을 제압한 오오쿠메 노 미코토(大久米命)을 주인공으로 했는 데 머리 모양, 귀걸이 등 장신구, 복식 등이 하니와를 참조했다. 1910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일·영박람회를 기념해 출판한 책의 표지에는 후지산과 함께 웃는 얼굴의 무녀(巫女) 하니와가 일본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고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정부가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하니와는 전의 고양을 위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한다. ‘하니아의 아름다움’이라는 책에서 한 시인은 하니와의 용모에 남방 전선에 복무하는 젊은 병사의 얼굴을 중첩시키며 “그 표정의 밝음, 단순소박함, 맑음”을 찬미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면서 하니와 활용은 죽음을 신성화하는 데까지 치닫는다. ‘천병신조’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품에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미켈란제로의 조각 ‘피에타’의 구도를 빌렸다. 죽음을 신성화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 구름을 타고 질주하는 조종사들은 ‘성스러운 바람’이라는 의미의 자살특공대 ‘가미카제’를 떠올리게 한다. 한 고고학자는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한 하니와를 두고 “마치 눈물을 참고 있는 표정이다. 자식이 전사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하니와의 얼굴은 ‘일본인의 이상’”이라고 했다.   

 

국립근대미술관은 1943년 7월에 발행된 ‘전투기’라는 시집에 ‘여인 하니와’라는 시가 실렸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일본 사회 전체가 순국의 분위기로 덮여 있었다. 전의 고양을 위해 애국시에도 하니와는 동원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