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당제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꼽히는 자유민주당(자민당)은 1955년 보수 성향의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며 만들어졌다. 이후 1993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원내 다수당으로 있으면서 집권 여당 지위를 누렸다. 그 기간 배출된 15명의 총리가 모두 자민당 소속이었다. 자민당과 비교하면 야당의 존재는 보잘것없었다. 일본이 복수 정당제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겉으로 봐선 이른바 ‘1당 독재’ 국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계 정치학자들은 양당제는 아니고 그렇다고 다당제는 더더욱 아닌 일본의 정당제를 ‘1.5당제’라고 불렀다. 딱 한 개의 거대 정당 말고는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정당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자유민주당 당사 모습. 자민당 홈페이지

1993년 자민당이 원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비록 군소 정당이긴 하지만 야당들 의석을 모두 더하면 자민당보다 앞섰다. 야당들이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하며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 비(非)자민당 정권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념과 정책이 제각각인 정당들의 연합체가 오래 유지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립정부는 채 3년을 가지 못하고 1996년 1월 무너졌다. 그렇게 재집권한 자민당은 이후 2009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가량 다시 정권을 잃은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일본의 여당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의 인기가 워낙 낮다 보니 오는 27일 총선에서 자민당의 과반 의석 확보가 어렵다는 관측도 제기되나 지켜볼 일이다.

 

의원내각제 국가의 원조로 꼽히는 영국은 19세기 들어 보수당과 자유당(현 자유민주당)의 양당제가 굳어지면서 두 정당이 번갈아 집권했다. 20세기에는 노동당이 자유당을 제치고 새롭게 보수당과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그런데 2010년 집권한 보수당 정부가 온갖 스캔들로 인기가 뚝뚝 떨어지더니 지난 7월 총선에선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며 1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뤘다. 하원 전체 의석 650석 중 3분의2에 가까운 무려 411석을 여당인 노동당이 가져갔다. 보수당이 차지한 의석은 121석에 불과하다. 제1야당이라고는 하지만 집권 여당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셈이다. 이를 두고 ‘영국에서 오랜 전통의 양당제가 무너지고 1.5당제가 등장했다’라는 논평이 쏟아졌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현 22대 국회는 야당인 민주당(170석)과 여당인 국민의힘(108석)의 양당 구도이나 두 정당 간 의석 격차가 상당히 크다. 뉴스1

한국은 기존 정당들의 이합집산은 물론 신당 창당도 무척 잦다 보니 선거 때마다 양당제와 다당제가 번갈아 출현한다. 그래도 소선거구제의 영향 때문인지 다당제보다는 양당제였던 기간이 확실히 더 길다. 이승만정부 시절의 자유당과 민주당, 박정희정부 때의 공화당과 민주당 등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이후로는 양당의 의석차가 차츰 좁혀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020년 21대 총선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석권한 반면 야당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113석에 그치며 양당 간 격차가 상당히 벌어졌다. 이후 여야가 바뀌긴 했으나 현 22대 국회 역시 민주당 170석 대 국민의힘 108석으로 차이가 무척 크다. 지금처럼 보수 정당이 지리멸렬하면 우리나라도 진보를 표방한 정당이 의회 권력을 사실상 독식하는 1.5당제로 변질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