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과 베니스에서 최고상을 거머쥔 영화 두 편이 잇따라 개봉한다. 제7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는 내달 6일 국내 관객과 만난다. 이 작품은 미국 성노동자와 러시아 철부지 재벌2세의 결혼을 둘러싼 소동극을 강렬한 에너지로 담았다.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룸 넥스트 도어’는 23일 극장에 걸린다. 스페인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어 장편 영화로 틸다 스윈튼과 줄리언 무어의 연기 향연이 펼쳐진다. 올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20만명) ‘가여운 것들’(15만명) ‘추락의 해부’(10만명) 등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예술영화들이 좋은 성적을 거둬,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지 주목된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내리는 눈
‘룸 넥스트 도어’는 존엄사를 통해 인간의 연대, 삶의 영속성과 아름다움을 돌아보게 한다. 종군기자였던 마사(틸다 스윈튼)는 암에 걸리자 옛 동료이자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언 무어)에게 연락한다. 마사는 “내가 날 먼저 죽이면 암이 날 죽일 수 없다”며 비참한 말로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잉그리드에게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 옆 방에 있어 달라 부탁한다. 영화에서는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죽은 사람들’ 마지막 문장을 두어 번 읊조린다. “눈이 부드럽게 살포시 전 우주에, 마지막 종말을 향해 하강하듯이, 모든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위에 내려앉는다.”
◆주변부 성노동자… 넘을 수 없는 벽
‘아노라’는 성노동자와 재벌2세의 충동적인 결혼을 다룬 블랙코미디다. 영화는 시끌벅적하게 시작해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키다 서서히 소리를 지우고 끝내 고요한 쓴맛으로 끝맺는다.
‘아노라’는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로 출발한다. 23살 뉴욕 스트리퍼 아노라(미키 매디슨)는 손님으로 온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을 만난다. 일주일 독점계약을 맺게 된 이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환락을 만끽하다 흥에 겨워 결혼하고 만다. 아노라가 엄청난 부를 누리는 것도 잠시, 러시아에 있는 재벌 부모는 불같이 화내며 하수인 3인방에게 이들의 혼인을 무효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아노라’의 전반부는 성과 파티가 넘친다. 붕 뜬 일상은 화려하고 자극적이다. 이들의 결혼에 부모가 제동을 걸면서 영화는 코미디와 소동극으로 방향을 튼다. 개성 없는 성노동자 무리 중 한 명 같던 아노라의 진가는 이때부터 드러난다. 부당한 폭력에 화내고, 힘껏 소리 지르며 저항하는 아노라의 에너지가 영화를 지배한다. 재벌가의 민낯이 드러날수록 밑바닥 계급인 아노라는 인간으로서 품위가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환상을 주진 않는다. 아무리 재벌가 자제가 나사 빠진 철부지이고 아노라가 인간으로서 격이 있어도, 돈과 권력은 그 자체로 타인을 모욕할 힘이 있다. 성노동을 둘러싼 계급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아노라가 위안을 얻기 위해서든, 타인의 성을 지배하기 위해서든 성관계를 주도해봐도 모욕당했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영화는 여운과 함께 씁쓸한 현실로 문을 닫는다. 베이커 감독은 올해 5월 칸 영화제 수상 소감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성노동자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