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파란불 켜진 여야의정 협의체…의료공백 해결 실마리 될까

의학회·의대협회 참여 '결단'에 사태 8개월만에 본격 의정대화 기대
대한의학회 대규모 단체지만 의협은 '불참'…전공의들도 대화 '부정적'
'2025년 정원' 놓고 갈등 예상…사태 해결 열쇠 쥔 전공의 설득 '과제'

대한의학회와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의대협회)가 여·야·의·정 협의체에 참여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면서 8개월 넘게 이어진 의료공백 사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참여 의사를 밝힌 대한의학회는 대부분의 전문의들이 소속돼 있는 단체이며 의대협회는 의대 교육을 책임지는 의대 학장들의 단체여서 본격적인 의정 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가 보이고 있다. 

다만 의료계 대표 단체인 의협이 불참을 선언하고 의료공백 사태의 당사자인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협의체 참여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데다, '2025년 정원' 논의 여부 등 세부 의제를 놓고 의정 간 이견이 큰 만큼 사태 해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 8개월여 만에 대화 물꼬…커지는 환자 고통에 '협상 불가피' 현실론

대한의학회와 의대협회는 22일 "전문가 단체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며 여야의정 협의체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한의학회는 각 진료과의 전문의들이 참여하는 단체로, 대한의사협회(의협)를 제외하고는 의료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체 의사의 80~90%인 전문의들이 산하의 26개 진료과별 전문학회에 소속돼 있다.

대구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환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의대협회는 의대 학장들이 속한 의대 교육 책임자들의 단체로, 의학교육계를 대표하며 의대생과 기성 의료계 사이의 징검다리 위치에 있다. 그동안 큰 폭의 의대 증원이 현실화되면 정상적인 의대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해 왔다.

의료계의 대표 단체인 의협이 불참 의사를 밝혔지만, 참여 결심을 발표한 이들 두 단체의 규모나 역할을 고려하면 의료계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단체의 참여로 여야의정 협의체가 출범하면 이번 의료공백 사태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의정대화가 시작하게 된다.

지난 2월 20일을 전후해 전공의들이 집단이탈을 하며 8개월 넘게 의료공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의료계와 정부 인사가 토론회에서 함께 참석하거나 일회성 만남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협의체에서 해법을 모색하며 얼굴을 맞대지는 않았었다.

이들 단체가 협의체에 참여하기로 한 데에는 장기간 의료 공백 상황에서 환자들의 고통이 커지는 상황에 대한 압박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시 모집을 진행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2025년도 증원 백지화'에만 집착할 수는 없다는 현실론도 영향을 미쳤다.

한 의료계 인사는 "이견이 있기는 했지만 (대한의학회 내에서) 이대로 손을 놓고 있는 것이 맞겠느냐. 이대로 가면 내년에도 (전공의와 의대생이) 안 돌아올 것이니 제자들을 살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두 단체는 이날 입장문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고 올바른 의료를 하겠다는 젊은 의사들의 충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면서도 "국민과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때, 잘못된 정책 결정에 따른 대한민국 의료의 붕괴를 더는 묵과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서울 시내의 대형병원에서 한 환자가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하고 있다.

◇ 의료계 내 '갑론을박'…전공의들은 "졸속합의 우려"·"안돌아갈 것"

의료계 내에서는 이들 단체의 협의체 참여 발표를 놓고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의정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기대와 정부에 또다시 이용만 당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엇갈린다.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대한의학회, KAMC의 결단에 응원을 보낸다"며 "모쪼록 논의가 잘 이루어져 우리나라의 의료체계가 하루빨리 건강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 의대 교수는 "두 단체가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사태의 시급성을 고려해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일단 '물꼬'를 텄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반면 최창민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 위원장은 "우리는 2025학년도 증원은 안 된다고 보는데 정부는 내년도는 조정 안 된다고 하니까 협상의 여지가 없다"며 "그동안 의료계가 이용만 당했다. 이러다 내년에 일단 뽑고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나가지 않겠느냐"고 정부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정작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다.

사직 전공의 A씨는 의학회 등에 대해 "대표성 없는 단체"라고 일축한 뒤 "이런 행동은 전공의와 의대생의 불신만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또 다른 사직 전공의 B씨도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의학회와 의협의 높은 분들이 아직 정부와 협상해보려는 모습이 실망스럽다"며 "오히려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굳건해지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다만 사직 전공의 C씨는 "일부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2020년처럼 졸속 합의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제동을 걸어줄 공식적인 소통 창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의학회와 의대협회의 협의체 참여 결정이 알려지자 의사 커뮤니티에서는 교수들을 비하하며 "본성을 못 버리고 또 배신했다", "만에 하나라도 졸속 합의하고 다시 돌아오라고만 해봐라" 등의 비난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 '2025년 정원' 논의 여부 쟁점될 듯…'전공의 대화 참여' 관건

이처럼 의료계 내에서 대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은 상황에서 협의체는 당장 의제 설정에서부터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의료계와 정부는 '2025년 의대 정원'을 협의체가 논의할 의제에 넣을지를 놓고 충돌할 것으로 보인다.

의료계는 내년 의대 증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여러 차례 2025년 의대 정원을 협의체에서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난 3일만 해도 대한의학회와 의대협회는 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와 연석회의를 연 뒤 "정부가 2025년도 의대 정원을 포함해 논의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정부는 내년도 입시가 진행 중인 만큼 사실상 2025년 의대 정원 백지화는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장상윤 사회수석.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비서관은 지난 4일 라디오 방송에서 2025학년도 정원 문제에 대해 "수시 입시가 진행 중이고, 대입 절차가 상당 부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의제 논의와 별개로 이미 사실상 활시위를 떠났다"고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협의체 출범으로 사태 해결을 위한 대화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협의체 이외에도 의료계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리가 다양하게 마련될 수 있다.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서울의대교수비대위)는 지난 10일 장상윤 수석과 정경실 보건복지부 의료개혁추진단장이 참석한 가운데 토론회를 개최했고, 조만간 비슷한 토론회를 다시 개최할 예정이다.

다만 의료공백 사태의 당사자인 전공의들과 의대생이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고 대화에 부정적인 상황은 사태 해결에 커다란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정부와 의료계가 '통 큰' 양보를 통해 합의점을 찾더라도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의료공백 상황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협의체 등을 통한 의정대화가 성공을 거두려면 어떻게든 전공의와 의대생을 대화의 틀 안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한 사직전공의는 "정부가 진정한 대화 의지가 없다면 결국 전공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키는 정부와 전공의가 쥐고 있는데, 대한의학회와 의대협회가 크게 뭘 바꾸긴 어렵지 않겠냐"고 말했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