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사러 편의점도 못 가고 머리 깎으러 미용실도 못 들어갑니다”(원고 측 참고인)
“느리지만 정부가 제도·정책을 방치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피고 측 참고인)
장애인이 소규모 시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오랜 시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면 국가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을까? 23일 대법원은 3년 만에 공개변론을 열고 국가가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이날 지체 장애인 A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 청구 소송 상고심에 대한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전합이 공개변론을 실시한 것은 2021년 이후 3년 만이다. 대법원은 ‘입법부작위’로 인한 국가배상책임 인정 여부가 다른 영역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변론을 공개로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A씨 등은 국가가 24년간 옛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아 법에서 보장하는 장애인 접근권이 침해됐다며 국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장애인등편의법은 장애인을 위한 편의제공 의무를 부담하는 소규모 소매점의 범위를 시행령에 위임했다.
하지만 1998년 만들어진 해당 시행령은 소규모 소매점 기준을 바닥면적의 합계가 ‘300㎡(약 90평) 이상인 시설’로 정하며 문제가 생겼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국 편의점 약 97%는 장애인 출입로나 호출벨 등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시행령은 2022년 법원이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 미설치가 차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한 뒤에야 바닥면적 기준을 ‘50㎡(약 15평) 이상 점포’로 강화하는 내용으로 개정됐다.
이 사건은 20년 이상 시행령이 개정되지 않은 데 국가의 고의나 과실이 있는지, 입법미비로 인해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가 쟁점이다. 앞서 1·2심 법원은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한다고 판결하면서도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날 원고 측 대리인은 “관련 법률은 장애인 등이 일상에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시설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권과 국가 의무를 정했다”면서 “시행령이 개정되는데 통상 5~7개월이 소요 되는데 이 사건은 24년이 걸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008년 장애인차별법이 시행되고 2014년 UN 장애인인권권리위원회의 권고,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개정 권고가 있었음에도 개정이 지연됐다고 했다.
참고인으로 출석한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1998년 장애인등편의법이 시행되면서 휠체어 사용자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면서 “그러나 면적 기준을 제한하면서 음식점, 카페, 약국, 식품점 등 대부분 소매점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시설이 됐다”고 말했다.
피고 측 대리인은 “소매점 접근권 개선은 소상공인이나 영세업자가 직접 관련돼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며 “정부는 부족하나마 접근권을 포함한 지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간이용 경사로가 안정적이거나 효과적이지 않고, 지체장애인에게 온라인 구매 등 여러 대체 수단이 마련되어 있다는 논리도 펼쳤다.
정부의 부작위가 인정되더라도 손해를 배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양측 의견이 갈렸다.
원고 측은 “1인당 100만원, 그보다 적은 10만원이라도 손해배상이 인정돼야 한다”며 “국가 재정 문제로 배상책임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부 측은 접근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침해됐는지 불분명하고 관련 제도를 유지·개선하는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들의 과실이 없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