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진미한 조센호테루 낙성-본일부터 개업.”(1914년 10월10일자 매일신보)
우리나라에 호텔이 들어선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조선호텔의 설립은 일종의 ‘사건’이 됐다. 독일인 건축가가 지상 4층, 지하 1층 벽돌건물로 설계한 조선호텔은 ‘조선 최대 규모’라는 타이틀을 달고 등장했다. 아르누보 양식에 바로크 지붕과 화강석으로 기단을 둘러 건축미가 뛰어나다는 호평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 됐다. 조선호텔은 당시 외국인들에게 유일한 선택지였던 최고급 호텔이자 모던걸·모던보이들에게는 서구 문화와 최신식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주요한 공간이었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산실이었던 조선호텔은 지난 110년간 서울 중구 소공동을 지키며 격동의 대한민국 역사를 목격해왔다.
◆최초 전동 엘리베이터·뷔페… 서양 문물 전파
이처럼 개화기 서양의 최신 문물을 받아들이던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 조선호텔은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다. 국내 최초로 프랑스 음식과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었고, 한국 최초의 뷔페와 아이리시펍이 시작된 곳으로 새로운 미식문화를 선도했다. 1924년 국내 최초로 등장한 조선호텔 내 프렌치 레스토랑 ‘팜코트’가 문을 열었으며, ‘선 라운지’에서는 1930년 국내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팜코트의 통유리 온실 안은 이국적인 나무가 놓여 있는 공간에서 세련되게 차려입은 당대의 명사들이 자리를 빼곡히 채우고 담소를 나누었다.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오픈한 최초의 뷔페 레스토랑은 1970년대에 오픈한 ‘갤럭시(Galaxy)’로 현재 웨스틴 조선 서울의 뷔페 레스토랑 ‘아리아(Aria)’의 전신이 된 곳이다. 오찬으로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와 콜드미트, 생선, 치즈 등 서양인들을 위한 양식 메뉴들을 비롯해 한국인들을 위한 다양한 한식 메뉴를 선보였다. 이후 뷔페는 곧 트렌드가 되어 조선호텔을 필두로 모든 호텔이 뷔페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조선호텔 재건축 후 개관한 뷔페 레스토랑 ‘갤럭시’는 ‘카페 로얄’로 간판을 변경했다가 2008년 지금의 ‘아리아’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근·현대 역사의 현장… 201호에 묵은 인물들
1914년 문을 열면서부터 대표 호텔로 자리매김한 조선호텔의 숙박객 명단은 정치, 사회는 물론 예술과 문화의 주요 인사들로 빼곡하다. 특히 ‘임페리얼 수우트(imperial suite·황제의 스위트룸)’라고 불리던 특실 ‘201호’에는 1940∼50년대 격동의 시기, 해방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인물들이 거쳐 갔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조선호텔에 거처를 정하고 그곳에서 미군정을 이끌어 갔다. 조선호텔의 VIP용 201호실에 투숙한 최초의 한국인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그는 1946년 4월에 거처를 옮길 때까지 201호실을 정치 활동의 중심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당시 중경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도 이 전 대통령을 찾아오면서 201호에 머물렀다. 그다음 201호 열쇠를 건네받은 사람은 개화운동의 지도자이자 독립신문 발행인이었던 서재필 박사다. ‘주한미군사령관의 조선 문제 최고 고문’이었던 그는 201호에 장기 투숙하며 통일된 정부를 세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201호 마지막 VIP는 1964년 서울에서 개최됐던 태평양아시아지역관광협회(PATA) 총회 워크숍을 위해 방한한 휴버트 험프리 미국 부대통령이다.
201호가 아니더라도 국빈이 방한한다거나 외국 고위·저명인사가 한국을 찾을 땐 대부분 조선호텔에 머물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메릴린 먼로와 밥 호프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위문공연차 한국에 왔다가 숙박했다.
이후에도 조선호텔은 1971년 6월 제2차 남북 적십자회담 본회의가 열리는 등 역사의 현장으로 남았다.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등 미국 대통령이 국빈방문했을 때 투숙하는 등 ‘영빈관(迎賓館·국빈 전용 숙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포드 전 대통령이 키신저 국무장관, 해외 언론인 303명 등과 함께 방한하면서 건물을 통째로 빌리기도 했다. 포드 방문을 기념해 조선호텔은 야외수영장의 이름을 지금까지 ‘포드 수영장’이라고 부른다.
또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서울 중심부에 기업 본사가 들어서고 외국기업 한국지사가 발을 들이면서 조선호텔은 비즈니스 중심지로 발전해 갔다.
◆110년 전 조선호텔 모습은
처음 지어졌던 110년 전에는 ‘경성조센호테루’였고 지금은 ‘웨스틴 조선 서울’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내 최초 럭셔리 호텔의 시대를 알렸던 조선호텔은 정체성을 나타내는 ‘조선’이라는 호칭을 유지하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호텔로 성장해 왔다.
조선호텔앤리조트는 110년 전, 1914년의 조선호텔의 모습을 레고 브릭으로 재현한 특별전 ‘헤리티지 조선호텔로 시간여행(Time Travel to Heritage Josun Hotel)’을 지난달 30일부터 호텔 로비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달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의 시대상과 최초의 기록들을 엿볼 수 있도록 예전 건축 도면과 사진 자료를 토대로 조선호텔의 전면과 후면, 콘서트홀과 연회장, 최초의 양식당 팜 코트, 스위트 객실 201호 등 주요 공간을 10만개의 레고 브릭을 사용해 디테일하게 표현했다. 전 세계 레고 공인작가 중 한 명인 반트 김승유 작가와 협업했다.
당시의 조선호텔 모습과 지금의 웨스틴 조선 서울의 공간을 비교해보며 호텔을 방문한 고객들이 110년의 헤리티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한 이벤트다.
해당 전시는 웨스틴 조선 서울을 시작으로 11월에는 부산 해운대구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부산, 12월에는 제주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제주에서 고객들을 맞이할 예정이다. 아울러 공식 홈페이지에서 연말까지 ‘조선호텔 헤리티지 홀’이라는 테마로 1914년 개관 당시 모습을 VR로 감상할 수 있다.
조선호텔 관계자는 “110주년을 맞아 고객 감사의 의미를 담아 다양한 이벤트와 1914년 당시 모습을 레고로 재현한 전시를 준비했다”며 “앞으로도 110년을 이어온 노력과 열정으로 고객을 위한 최상의 환대와 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