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 올림픽이 한창이던 1976년 7월23일 여자 배구 예선에서 한국과 동독이 맞붙었다. 한국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대이긴 하나 동독은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스포츠를 서독과의 체제 경쟁 수단으로 여긴 동독은 엘리트 체육 육성에 과하다 싶을 정도의 투자를 했다. 여기에 종목을 막론하고 운동선수들의 신체 조건 또한 뛰어났다. 경기 초반 한국은 내리 두 세트를 내주며 쉽게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3세트 들어 에이스 조혜정의 스파이크가 살아났다. 165㎝의 단신인 조혜정이 장신의 동독 블로커들 숲을 뚫고 연신 강타를 내리꽂았다. 3차례나 동점을 이루는 접전 끝에 한국이 3세트를 따냈다. 그 뒤로도 혼신을 다한 우리 대표팀은 4, 5세트까지 차례로 이기며 3-2 역전승을 거뒀다. 결승 토너먼트에 오른 한국은 동메달을 수확했는데, 남녀를 통틀어 우리 단체 구기종목 역사상 첫 올림픽 메달에 해당한다.
올림픽 직후인 1976년 8월19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선수단을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했다. 박 대통령은 동메달리스트인 여자 배구 선수들 앞에서 한국 대 동독 시합을 언급하며 “우리 선수의 키가 동독 선수들의 어깨밖에 오지 않던데도 이를 점프력으로 극복, 정말 잘 싸웠다”고 칭찬했다. 특히 조혜정에겐 “동독에 두 세트 지고 나서 이겼지? 그때 기분이 어떠하던가”라고 물었다. 조혜정은 “여기에서 져서는 안 되겠다고 단단한 결심을 하고 싸웠다”고 답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동서 냉전이 극심했던 그 시절 한국, 미국 등 자유 진영이 소련(현 러시아)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보이콧하기로 하면서 우리 여자 배구팀의 모스크바 대회 출전은 무산됐다. 훗날 조혜정은 몬트리올 올림픽을 떠올리며 “동메달이 걸린 3·4위전보다 동독과의 예선전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몬트리올 올림픽 이듬해인 1977년 당시 24세이던 조혜정은 국가대표 은퇴를 발표했다. 국내 실업 리그에서 뛰며 생긴 무릎 부상의 악화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2년 뒤인 1979년 조혜정은 건강에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배구 강국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곳 리그에서 2년간 선수 겸 코치로 활약했다. 한국 여자 배구 선수가 해외 무대로 진출한 첫 사례에 해당한다. 오늘날 ‘배구 여제(女帝)’로 불리는 김연경의 행보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한국배구연맹 경기운영위원, 경기감독관 등을 거쳐 환갑을 앞둔 2010년 프로배구 GS칼텍스 감독을 맡았다. 이로써 한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여성 1호 감독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선수 시절의 조혜정을 보고 어느 외국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나는 작은 새’(Flying Little Bird)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그의 애칭이 됐다. 한국 배구의 전설이라 할 그 조혜정이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30일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생전에 남긴 유언 편지에서 고인은 “이제 난 너(배구)와 더 이상 친구를 할 수 없게 됐단다”라는 말로 거의 평생을 함께한 배구에 작별을 고했다. “고통을 참으면서 이 편지를 쓴단다. … 170㎝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키로 배구도 했는데 이것(췌장암) 하나 못 이기겠어라며 호기롭게 맞서 싸웠지만, 세상에는 안 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이야. … 배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올림픽 배구 동메달로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희망을 선사한 고인에게 되레 우리가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