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조도의 공간, 곳곳의 어둑한 자리로부터 묵직한 북소리가 새어 나온다. 낡은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낸 옛 여관의 터가 거대한 동물의 심장처럼 박동한다. 그 몸속을 헤집듯 발걸음을 내딛는 동선 가운데 불현듯 부엉이 울음소리가 포개어진다. 청아한 울림으로 시작하여 음울한 진동으로 끝맺는 신묘한 짐승의 소리, 까만 밤의 어둠을 형형하게 응시하며 내뱉는 한숨 같은 울부짖음이 거듭 귀를 물들인다.
통의동 소재의 전시공간 보안1942에서 진행된 이승애(45) 개인전 ‘보태닉 드럼(Botanic Drum)’이 지난 3일 막을 내렸다. 해당 장소는 보안여관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숙박시설을 보수하여 2007년 새롭게 문을 연 대안적 전시공간으로, 과거에는 시인 서정주와 이상, 윤동주 등 근대문인 및 화가 이중섭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머무르던 거점이었다. 역사를 지닌 장소는 특유의 정서를 자아낸다. 그것이 무상함에 대한 연민이든, 애틋함이나 그리움이든, 또는 경이로운 호기심이든, 타인의 기억이 켜켜이 묻힌 공간들은 어느 임계점에서 불특정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비한 종류의 서정을 얻게 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승애가 종이를 무구 삼아 불러낸 정령들이 그토록 그곳에 어우러졌던 까닭은. 오랜 세월 소리 없이 배어 든 수많은 감정과 마음들이 어느덧 장소의 넋이 되어, 숨죽인 채 누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자연의 영혼을 건져 올리듯 나무의 몸통과 잎사귀, 돌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흑연을 문대어 떠낸 탁본들이 이승애가 행하는 의식의 도구이다. 영매로서의 작가는 겸허한 몸짓으로 자신의 화면에 종이를 포개고, 시간을 덧대고, 소리를 입히며 그만의 주술을 왼다. 시베리아의 샤먼이 망아(忘我)의 경지에 올라 구천을 떠도는 갖가지 영혼에 접신하고자 썼다는 종이가면을 오리며, 연약한 인간의 심장에 공명하는 치유의 제의를 위하여.
◆공명하는 심박들
이곳의 땅 위에 숨쉬는 존재들은 모두 같은 태양을 본다. 동일한 별의 양분을 먹고 자라나 그것의 온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대지의 덧없는 생명들은,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의 닮은꼴이다. 여관의 내벽이 바래고 기둥이 닳기 전 여기에 짐을 풀었을 애젊은 얼굴들 또한 지금과 꼭 같은 태양빛을 쬐었을 것이다. 경복궁을 향하여 비스듬하게 난 소박한 창으로 머리를 내어 그날의 하늘을 보았을 테다.
바로 그 창가에 이승애의 또 다른 영상작품 ‘페이퍼 드레스’(2024)가 걸렸다. 사람의 몸을 닮은 흰 종이는 샤먼의 의복이자 무구를 본떠 오린 것이며 머리가 있을 자리에는 빛이 놓였다. 지나치게 눈부시지 않도록 널찍한 나뭇잎의 탁본을 길게 난 창문 위에 포개어 두었다. 숨쉬듯 생동하는 원형의 빛은 실제로 이승애가 날마다 촬영한 태양빛을 영상에 덧댄 것이다. 아마도 그로서 가능한 가장 커다란 자연의 탁본으로서 말이다. 따뜻하고도 뜨거운, 다정하게 온화한 한편 모질도록 가혹한 초월적 존재의 빛은 살아 있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영혼들의 시간을 자신의 차원 안으로 통합시킨다. 그 앞에서 사람의 역사는 그저 아득한 넋이 된다.
여전히, 공간을 울리는 북소리의 운율은 살아 있는 생명의 심장박동을 닮았다. 수백 가지 소리 가운데 알맞은 것을 찾아내어 서로를 접붙인다는 설명이 샤먼의 종이가면을 연상시킨다. 기약 없는 공명을 위하여, 끝없이 목소리를 바꾸며 울부짖는 애처로운 영혼들을 상상한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무껍질을 탁본하고 오려내는 겸허하고도 지난한 몸짓 가운데 이승애의 마음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을 테다. 이미 오랜 옛날 터부시된 미신들을 되짚어 보며 식물에 물든 샤먼의 몸이 이윽고 계시에 도달하였음을 새삼 믿는다. 다만 동시에, 그것이 어떠한 낯선 우주가 아닌 우리의 세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임을 짐작하여 본다. 그 모든 기적이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에 공명하는 자연의 위로였을 것임을.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