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 가운데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방위 예산을 지금보다 더 늘려야 한다는 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트럼프는 1차 집권기(2017∼2021) 내내 유럽 동맹국들에게 국방비 증액을 강력히 요구했고, 그로 인해 EU 일부 회원국과는 극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6일(현지시간) AFP 통신에 따르면 안드리우스 쿠빌리우스 EU 국방 담당 집행위원은 이날 유럽의회에서 “회원국들은 국방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며 “그것이 트럼프의 요구 사항이라서가 아니라 푸틴이 가하는 위협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령하고 벌써 3년 가까이 전쟁을 수행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맞서려면 방위비 증액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논리다.
리투아니아 총리를 지낸 쿠빌리우스 집행위원은 최근 정보 당국이 내린 평가를 인용해 “러시아가 2020년대 말까지 EU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결의를 시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외에 다른 친(親)서방 유럽 국가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는 “언제 있을 지 모를 러시아의 군사적 침략에 맞서 EU의 대비 태세를 시급히 강화해야 한다”며 “이것이야말로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쿠빌리우스 집행위원은 “우리는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유럽 동맹국들은 미국의 방위비 증액 요구에 크게 당황했다. 트럼프는 “모든 나토 회원국이 국내총생산(GDP)의 최소 2% 이상을 국방 예산으로 써야 한다”며 GDP 대비 방위비가 2%에 못 미치는 나라들을 몰아붙였다. 그 때문에 트럼프 임기 내내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 간에는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유럽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국방비를 늘리기 시작했다. 상당수 국가가 올해까지 ‘GDP 대비 2% 이상’ 조건을 달성한 상태다. 그러자 트럼프는 대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GDP 대비 3% 이상’으로 기준을 더 올렸다. 그러면서 유럽 동맹국들을 향해 “국방에 충분한 지출을 하지 않는다면 러시아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장려하겠다”고 거듭 경고했다.
트럼프 재집권이 확정된 상황에서 EU 회원국들은 트럼프가 처음 등장한 2017년만큼 놀라거나 하지 않고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이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를 한 번 겪어본 데다 방위비 증액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트럼프 당선 직후 축하 성명에서 “EU와 미국은 단순한 동맹 그 이상”이라며 “진정한 동반자 관계라는 인식 아래 함께 노력함으로써 성과를 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