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는 이제 변화, 여성, 정의를 위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마초(남성 중심) 사회’ 타파를 선언한 멕시코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62)의 발 빠른 개혁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지난달 1일(현지시간) 취임 첫 일성으로 변화와 여성, 정의를 언급하며 6년 임기 내 ‘새로운 멕시코’를 위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 것임을 선포했다. 부처 장관은 남녀 동수로 임명하고 대통령실 내 주요 보좌진에도 여성을 대거 선임했다. 그는 취임 사흘째에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헌법에 명문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일주일 만에 마약 카르텔 등 치안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군·경찰 공동 대응 등 전략을 발표했다.
◆여성과 정의 앞세운 행보
◆개혁 동력, 배경은
셰인바움 대통령의 강력한 개혁 배경에는 탄탄한 정치적 ‘뒷배’가 존재한다. 먼저 셰인바움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까지 높은 지지율을 구가했던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정식 후계자’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은 2018년 12월 취임 이후 거의 매일 아침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 국민과 소통을 이어왔고, 임기 마지막 달 멕시코 유력 일간지 엘피난시에로가 주관한 정부 평가 설문조사에서 68% 지지율을 기록했다. 현지 일간 라호르나다는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이 1929년 이후 90년 가까이 멕시코 정치사를 지배했던 우파 보수 성향 정치 문화를 왼쪽으로 돌리며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고, 근로자·약자 위주 정책을 통해 수십년간 정치권으로부터 무시당한다고 느꼈던 많은 주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성과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은 지난달 1일 “셰인바움 대통령은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의 정치적 제자이며 그 유산을 이어가겠다는 약속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 같은 긴밀함의 표시로 새 정부의 재무장관, 공공안보장관 등 내각에 오브라도르 심복들이 지명됐다”면서 “셰인바움 대통령이 이어받은 정치적 유산은 또 국회에 그를 지지하는 여당 모레나당을 포함한 정치 연합이 하원 과반수, 상원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외신은 셰인바움 대통령이 분석적이고 데이터 중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기후과학자로 명성이 자자한 그는 에너지공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으며 2007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유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팀에 속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이 2000년 멕시코시티 시장으로 선출된 후 멕시코시티 환경부 장관으로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2018∼2023년 멕시코시티 시장을 지낸 엘리트 좌파 정치인으로 꼽힌다. NPR은 “셰인바움은 특히 코로나19 확산 시기에 멕시코시티에서 진단 검사를 확대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촉구하며 오브라도르와 차별점을 드러냈다”고 전했다.
◆당면 과제, 걸림돌도
여성 대통령이라는 상징과 그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큰 만큼 멕시코의 고질적인 문제인 여성에 대한 폭력, 권리 신장 등이 우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2022년 멕시코 국가통계기관 INEGI 조사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멕시코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증가해왔으며 여성(15세 이상)의 70%(약 5050만명)는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INEGI는 “평균적으로 매일 약 10명의 여성이 살해되고 수만명이 실종된다”며 “특히 성폭력 신고가 5년 전과 비교해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체적 또는 성적 폭력을 경험한 여성의 대부분은 가해자를 공식적으로 신고하지 않았고 공공기관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다”고 강조했다.
갱단이 주도하는 폭력 사태 등이 최근 늘어난 것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INEGI에 따르면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이던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 동안 멕시코에서는 17만1085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이전 2개 정부 약 12년간 발생한 살인 사건(15만7158건)보다 많다. 정치인, 공직자에 대한 공격도 빈번하다. 2018년부터 2024년 3월까지 정치인, 정부 관계자, 정부·정당 시설에 대한 공격, 살인, 위협은 1709건으로 조사됐다.
전임 정부가 펼친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떠안은 막대한 정부 부채와 부진한 경제 성장 전망은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일 “셰인바움 대통령은 1980년대 이래 가장 큰 예산 적자를 이어받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멕시코의 올해 6월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부채 비율은 48.2%다. 이에 반해 세수는 부족한 상태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멕시코의 GDP 대비 세금 비중은 OECD 38개국 중 가장 낮은 16.9%로 OECD 국가 평균 34%, 라틴 아메리카 평균 22%보다 낮다. 최근 멕시코 중앙은행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4%에서 1.5%로 낮추고, 2025년 전망치도 1.2%로 낮췄다.
재집권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멕시코에 가장 큰 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2016년 재임 당시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웠던 트럼프는 대선 유세 기간 멕시코를 겨냥해 “100, 200, 2000%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멕시코의 달러 대비 페소화는 급락했다. 남미에서 미국으로의 ‘마지막 월경’ 시도가 급증할 가능성에 대비해 조 바이든 행정부는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 수립에 나섰다고 7일 NBC방송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