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 차트 속에 숨은 경제학/ 아누팜 B 제나·크리스토퍼 워샴/ 고현석 옮김/ 어크로스/ 2만2000원
유치원·초등학교 교실에는 나이가 최대 364일 차이 나는 아이들이 모여 있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성장기에 이 정도 나이 차는 건강과 학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미국 하버드 의대 연구팀은 같은 반 아이들의 나이 차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율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로 했다.
연구팀은 보험금 청구 데이터베이스에서 2012∼2014년 유치원에 입학한 어린이 40만명을 분석했다. 그 결과 9월1일이 입학 기준일인 주에서 8월에 태어난 아이들은 직전 해 9월에 태어난 같은 반 친구보다 ADHD 진단·치료 비율이 34%나 높았다. 입학 기준일이 9월1일이 아닌 주에서는 8, 9월생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이는 ADHD 진단 때 ‘상대연령 효과’가 개입돼 생긴 현상이다. 당뇨·고혈압과 달리 ADHD 진단은 주관적 판단에 많이 의존한다. 안절부절못함, 부적절하게 뛰어다니거나 기어오름, 지나치게 말이 많음, 차례 기다리기를 어려워함 등이 ADHD의 주요 증상이다. 교사·의사는 이런 기준을 갖고 또래끼리 비교해 ADHD 여부를 판단한다. 364일이나 어린 아이가 ADHD 진단 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책은 질병 예방과 치료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비용도 언급한다. 비싼 의료비뿐 아니라, 병원까지 가는 번거로움, 약을 받는 데 드는 에너지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모두 치료에 방해 요인이 된다. 아동 독감 예방접종이 이런 경우다. 미국에서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소아과에 데려가려면 상당히 번거롭다. 이는 독감 예방접종률에 영향을 미친다. 아이의 연례 건강검진과 접종 시기가 겹치면 겸사겸사 주사를 맞기 편하다. 반면 봄에 태어난 아이들은 예방접종을 하러 일부러 소아과를 다시 찾아야 한다.
저자들이 미국 2∼5세 112만명을 조사해보니 10월에 태어난 아이의 55%는 독감 예방접종을 받은 반면 5월생은 이 비율이 40%에 불과했다. 미국에서는 연례 건강검진을 주로 태어난 달에 받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예방주사를 맞지 않은 아이는 지역사회 감염을 촉발할 수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인 독감의 50%가 손주들과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들은 이런 종류의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공중보건에 영향을 주기에 전향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의사의 경력, 성별, 학력, 국적은 실력과 얼마나 상관관계가 있을까. 입원전담 전문의의 경우 충분히 많은 수의 환자를 본다면 나이와 진료 실력은 무관했다. 다만 환자를 많이 보지 못할 경우 젊은 의사의 성과가 나았다. 외과의는 다소 달랐다. 40세 미만 외과의의 환자 사망률은 6.6%, 40대 외과의는 6.5%, 50대는 6.4%, 60대 이상은 6.3%로 완만하게 줄었다. 외과의는 수술 경험이 중요해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의사의 정치적 성향도 진료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2016년 수행된 설문조사 기반 연구를 보면, 공화당을 지지하는 의사들은 임신중지 경험이 있거나 마리화나를 피운 환자에 대해 심각한 의학적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민주당 지지 의사보다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