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7일 대국민 담화·기자회견은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의 거듭된 국정 쇄신 요구에 대한 응답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담화·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정치권 관심은 한 대표가 내놓을 메시지의 내용과 수위에 집중됐다.
한 대표는 당일에는 침묵을 지키다 다음 날인 8일 오전 페이스북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한 대표는 페이스북 글에서 우선 윤 대통령이 자신의 4대 요구(대국민 사과, 대통령실 개편·쇄신 개각, 김건희 여사 대외활동 중단, 특별감찰관 임명)에 대한 수용 의사를 밝혔다고 언급했다. 한 대표는 “대통령께서 어제(7일) 현 상황에 대해 사과하고, 인적 쇄신, 김 여사 활동 중단, 특별감찰관의 조건없는 임명에 대해 국민들께 약속했다”고 적었다.
그렇다고 한 대표가 윤 대통령의 담화·기자회견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다. 한 대표는 긍·부정 평가 자체를 하지 않고 “이제 중요한 것은 ‘민심에 맞는 수준으로 구체적으로 속도감 있게 실천하는 것”이라며 대통령실의 후속조치를 촉구했다.
동시에 당이 중심을 잡아 여권의 쇄신을 이끌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한 대표는 “민심에 맞는 실천을 위해서 당은 지금보다 더 민심을 따르고, 지금보다 더 대통령실과 소통하고 설득하겠다”며 “우선 당은 즉시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던 특별감찰관 임명 절차를 추진하겠다. 필요한 절차 준비를 지시했다”고 썼다.
한 대표가 윤 대통령 담화·기자회견에 대해 ‘잘했다’, ‘부족했다’와 같은 직접적인 평가는 삼간 채 후속조치에 초점을 맞춘 메시지를 낸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며 윤 대통령에게 강경한 어조로 쇄신을 조목조목 요구했던 한 대표의 그동안 발언들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이를 두고 한 대표가 사안의 폭발력을 고려해 여론 흐름과 대통령실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절제된 행보를 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이 국민 앞에 허리 숙여 사과하고, 김 여사 문제 등에 대해 비교적 긴 시간을 할애해 설명한 점 등이 보수층을 결집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도 이를 겨냥한 듯 담화·기자회견에서 줄곧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강조하고, “대구·경북(TK)의 절대적인 지지가 (저를 대통령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친윤(친윤석열)계가 윤 대통령의 담화·기자회견을 추켜세우며 윤 대통령 엄호에 나서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는 요소다. 한 대표가 섣부르게 메시지를 낼 경우 여권 분열을 촉발한다는 프레임에 걸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당정 지지율이 동반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야권이 고강도 대여 투쟁을 벌이고 있는 만큼 단합해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윤 대통령 담화·기자회견에 혹평을 쏟아냈던 친한(친한동훈)계 인사들도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대통령실의 후속조치가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8일 대통령실은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윤 대통령의 다자 외교 순방에 김 여사가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도 교체하고, 김 여사 활동을 보좌할 제2부속실을 설치하되 과거 정권과 달리 영부인의 집무실은 별도로 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 여사 라인’으로 지목된 강훈 전 대통령실 정책홍보비서관은 같은 날 “국정 쇄신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면 그 길을 걷겠다”며 한국관광공사 사장 지원을 자진 철회했다.
다만 한 대표가 첫 실천과제로 꼽은 특별감찰관 추천 문제가 한 대표의 향후 행보를 결정할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 대표는 8일 이와 관련해 “필요한 절차 준비를 지시했다”고 했지만, 친윤계인 추경호 원내대표는 “의총 등을 통해 의원들 의견을 듣고 최종적인 방향성을 정할 것”이라며 다른 메시지를 냈다. 친윤계는 민주당이 북한인권재단 이사를 추천해야 특별감찰관을 임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런 가운데 친윤계에서 윤 대통령이 친한계로 표현되는 여당 내 ‘다른 목소리’를 무조건 배척하기만 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재원 최고위원은 8일 YTN 라디오에서 “대통령은 이제 여당 내에 유력한 대통령과 생각이 다른 일부 정치세력을 인정해야 하고, 또 야당이라는 거대한 반대자에 맞서 정치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며 “견제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훨씬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