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극단이 올해 마지막 연극 ‘퉁소소리’에 출연할 배우들을 뽑은 지난 6월 오디션 현장. ‘퉁소소리’ 각색과 연출을 맡은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 등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한 지원자가 있었다. 2막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홍도이모 역에 지원한 배유 류주연(53)이다. 심사위원들은 ‘아니 저 사람이 왜 나와?’ 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극단 산수유 대표이자 평단과 관객 호평을 받았던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 ‘기묘여행’, ‘12인의 성난 사람들’ 등의 연출가로 연극계에서 지명도가 높다.
지난 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류주연은 “‘신인 배우’나 다름없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도 크고 정말 배우를 하고 싶다”며 “(내가 배우한다면) 농담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어서 진심을 보여주려 했다. 태어나서 처음 도전한 오디션이었다”고 말했다. ‘떨어져도 좋다’ 생각하고 오디션에 지원한 또다른 이유는 극단 산수유 대표로서 단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기 위해서다. “배우라는 게 너무 어려워서 10년을 해도 제자리인 경우가 많아 낙담하는 후배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50대인 나도 이제 시작하잖아. 걱정하지 말고 힘내, 넌 할 수 있어’라고 말이 아닌 경험으로 얘기해주고 싶었습니다.”
류주연은 원작인 ‘최척전’을 탐독하면서 정보가 부족한 홍도이모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하고 연습한 뒤 오디션에 임했다. 연출로서의 강점인 분석력 덕인지 결과는 합격이었다. 530명 지원자 중 14명을 뽑는 평균 경쟁률 38대 1을 뚫은 것이다. 고선웅 연출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심사 당시를 떠올리며 “독보적인 배우였다. 어디에다 집어 넣어도(어떤 배역을 맡겨도) 어울리고 편안하게 해주는 캐릭터여서 뽑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빈말이 아니다. 류주연은 ‘퉁소소리’에서 홍도이모뿐 아니라 여관 주인과 피란민, 베트남상인, 취사병 등 10역을 소화한다. 대사가 한 마디에 불과하거나 대사 없이 죽는 단역조차도 허투루 하지 않는 그에게 출연 배우 중 가장 많은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저는 연출을 해봐서 연출(가들)이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고, 얼마든지 연출 입맛에 맞는 배우가 될 수 있다고 홍보합니다.(웃음) 많은 연출이 ‘퉁소소리’를 보러 올 것 같은데 작품할 때 작은 역이든 단역이든 불러주면 좋겠어요.”
앞서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 류주연은 2022년 연출한 ‘공포가 시작된다’ 때 주연 배우 우미화가 사정이 생겨 한 차례 무대에 서지 못하자 대타로 나섰다. 조연도 아니고 대사 분량이 많은 데다 극을 이끌어야 하는 주연의 빈자리를 직접 채운 것이다. 류주연이 평소 연출을 얼마나 철저히 하고 배우로서의 역량도 만만치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침 그 공연을 본 서지혜 연출은 이듬해 올린 연극 ‘장녀들’에 그를 조연으로 출연시켰다.
연극영화과나 대학극회 출신도 아닌 류주연은 몸으로 부딪치며 연기와 연출을 배웠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학습지 교사로 돈을 모아 사설 연기학원에 다녔다. 연기를 할 줄 알면 연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때 졸업작품 연출가로 온 이성열(62) 연출과 인연이 돼 그가 1997년 만든 극단 백수광부에 들어갔다. 백수광부에서 10년간 배우와 조연출로 활동하던 중 문예진흥원 공연예술아카데미(연출전공)에서 제대로 연극에 대해 공부한 다음 2008년 산수유를 창단했다. “이성열 선배는 스승과 같아요. 극단 이름 산수유도 지어주셨죠. ‘봄에 일찍 꽃을 피우고 붉은 열매가 약재로도 쓰이는 산수유에 빗대 연출로 빨리 인정 받고 열정적으로 살며 사회에 이로운 활동을 하라’는 뜻이 담긴 겁니다.”
이후 극단 이름대로 되긴 했다. 적지 않은 단원(현재 본인 포함 26명)을 이끌며 지금까지 40편가량 연출했다. 작품성이 검증된 해외 원작을 중심으로 일상적이면서도 시대적인 문제를 끄집어내 관객들의 ‘머리를 뜨겁게 하는’ 연출이 뛰어나다.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2011), 영희연극상(2019), 김상열연극상(2022) 등을 수상했다. 국립극단이 내년 4월 선보이는 연극 ‘그의 어머니’ 연출도 맡는다.
연출로서 다작한 것과 달리 배우로서 출연작은 10편가량에 그친다. 그는 “배우의 꿈도 강했지만 ‘나 따위가 어떻게 배우를 하나’란 자조와 감정을 잘 드러내길 꺼리는 성격 탓에 엄두를 못냈다”며 “15년 전 임신·출산 경험을 하면서 그런 빗장이 풀리고 용기가 조금 생겼다. 지금은 연출보다 배우로 인정받고 싶을 정도”라고 했다. 앞으로 ‘연출 겸 배우 류주연’보다 ‘배우 류주연’으로 불리길 바란단다.
연출가로선 자신의 장단점과 한계 등을 어느 정도 다 알게 됐지만 배우로선 이제 시작이라는 이유에서다. “솔직히 연출가로선 끝점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과연 더 좋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을까’ 걱정할 만큼 그동안 에너지를 다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계속 연출하다간 제명에 못 죽을 만큼. 이걸 극복하려면 제 기질부터 달라져야 하는 등 너무 피곤한 거예요. 하지만 배우로선 열심히 갈고 닦으면 더 발전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으니 뭔가 활력이 생깁니다. 배우 기질인가 봐요.(웃음)”
류주연은 “연기하면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 감동을 관객과 나누며 뿌듯해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연출적 감각으로 봤을 때 너무 훌륭한 ‘최척전’을(극화한 ‘퉁소소리’를) 만난 건 행운이다. 배우로서도 신나게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 중기 문인 조위한(1567~1649)의 소설 ‘최척전’이 원작인 ‘퉁소소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끔찍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뿔뿔이 헤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는 한 가족의 눈물겨운 여정을 그린다. 류주연은 “고선웅 연출 특유의 템포(빠르기), 무대 언어가 밀도 있는 연기와 너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작품”이라며 “개인적으로 고선웅 연출의 대히트 작품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능가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퉁소소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원로 배우 이호재(노인 최척)와 박영민(젊은 최척), 정새별(옥영) 등이 출연한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11∼27일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