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빚.’ 전기 ‘빛’을 쓰기 위해 후대에 ‘빚’으로 남는 방사성폐기물을 뜻하는 말이다.
한국이 1973년 첫 번째 원전인 부산 기장군 고리원전 1호기 건설 이후 세계적인 원전 강국으로 거듭났지만, 발전 과정에서 나오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사용후핵연료)은 처리하지 못해 고스란히 쌓이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 특히 최근 들어 안정적인 원전 산업 성장을 도모하고,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에너지 패권 경쟁에서도 뒤지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강하지만 고준위 방폐장 건설 지원 방안 등을 담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고준위 특별법) 제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10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원전 업계 등에 따르면 국내 원전은 2030년부터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이 포화상태에 도달한다. 가장 먼저 전남 영광군 한빛원전이 포화상태에 들어가고 경북 울진군 한울(2031년), 기장군 고리(2032년), 경북 경주시 월성(2037년)·신월성(2042년) 원전이 순서대로 포화가 된다.
한국 역시 신규 원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윤석열정부가 촉진한 ‘원전 르네상스’를 맞아 울진군 신한울 3·4호기가 9월부터 건설을 본격화했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에는 2038년까지 최대 3기의 원전을 새로 건설하고, 2035년부터 소형모듈원전(SMR)을 발전에 본격적으로 투입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원전 수요가 늘어날수록 사용후핵연료도 증가한다. 다른 원전 강국들은 이미 이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핀란드는 내년에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을 운영하고, 스웨덴과 프랑스, 미국, 독일 등도 관련 법을 통해 처분시설 건설준비에 들어가거나 부지선정 작업을 시작했다.
한국은 고준위 방폐장 건설의 선결 조건이 될 특별법 마련을 꾸준히 논의했으나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1대 국회 막판에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가 고준위 특별법을 통과시키기로 극적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결국 최종 불발돼 관련 법안이 폐기된 바 있다.
22대 국회에 들어서는 김석기, 이인선, 김성원, 정동만(이상 국민의힘) 의원과 김성환(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고준위 특별법을 재발의한 상황이다.
고준위 특별법은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외부에 저장하거나 영구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시설 등을 건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주민투표를 통한 부지선정,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특별지원금 지원 등 유치지역 지원, 전담조직 구성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지하 500m 이하 암반층에 공학적 방벽과 천연 방벽을 활용한 고준위 방폐장을 건설해 사용후핵연료를 국민 생활권에서 완전 격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별법 없인 고준위 방폐장 건설이 쉽지 않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특별법 없이 경북 울진·영덕군, 충남 안면도, 인천 굴업도 등 총 9곳에서 해당 부지선정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한 바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국내 전력 수요 대응은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원전 산업 경쟁력을 위해서 고준위 특별법이 시급히 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