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사라진 설산에서 돌덩이 와르르… 마을은 폐허가 됐다 [심층기획-COP29, 기후위기 현장을 가다]

<상> 돈이 드는 기후 이야기

‘유일한 수원’ 빙하가 사라진다
아제르바이잔 수도서 3시간 거리 마을
산에 수목 거의 없고 눈 점점 줄어들어
4년 전 폭우에 ‘돌비’… 여전히 방치돼
기후변화로 빙하두께 연평균 0.5~1m↓
관개시설 구축 여력도 없어 생계 위협

기후금융 1조3000억弗 어디로…
중앙아시아 등 투자·지원은 3%도 안돼
세계 에너지 투자 90% 中·선진국 집중
저소득국가, 투명성 문제로 7%에 그쳐
정부는 기후변화 탓 돌리며 해결 뒷짐
“투명성, 기후금융과 함께 풀 과제” 지적

‘암석을 채취하려고 좀 전에 다이너마이트 발파를 했다’고 해도 믿을 법한 장면이었다. 지난달 30일 찾아간 아제르바이잔 구바지구의 산골마을 보스타케시는 흡사 노천 채굴장 같았다. 마을 입구부터 성인 남성 키보다 높게 돌무더기가 쌓여 원래 마을 전경이 어땠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2020년 7월 비 내리는 어느 밤이었어요. 다들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는데 쿠콰콰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천둥소리랑은 전혀 다른, 칠십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굉음이 마을을 흔들었어요.”

지난 10월 30일 방문한 아제르바이잔 북부 구바 보스탄케시 마을이 돌더미에 갇혀 있다. 2020년 7월 기록적인 홍수로 떠밀려온 돌이 4년 넘게 방치돼 있다. 사단법인 넥스트 제공

주민 나디시 나디로프(71)는 빗물에 휩쓸려 떠내려오는 거대한 돌덩이를 보며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집 안까지 물이 차오르자 그는 아들 가족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무릎까지 차오른 진흙을 헤집고 돌이 굴러오는 반대편 집 외벽에 바짝 붙어 섰다. 공포에 질려 우는 아이들을 달래려면 무슨 말이든 해야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거든요. 비야 가끔씩 오지만 그런 ‘돌 비’는 처음 봐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 여기 보이는 이 많은 돌이 전부 다 그날 쏟아졌답니다.”

비극적인 홍수가 지나간 뒤 마을은 폐허가 됐다. 30가구 중 7가구가 떠났고, 남은 주민들은 돌담으로 집 주변을 둘렀지만 비만 오면 여전히 두렵다. 소와 양을 치던 목가적인 마을은 이제 없다.

◆사라지는 빙하가 두려운 사람들

카스피해 서쪽에 자리한 아제르바이잔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90%가 채 안 된다. 크지 않은 나라지만 반사막, 아열대부터 툰드라에 이르기까지 무려 9개나 되는 기후대가 존재한다. 보스타케시로 가는 길도 그랬다. 수도 바쿠에서 북쪽으로 차로 세 시간을 달리는 내내 미국 모하비 사막 같은 건조지대가 이어지더니 보스타케시가 있는 구바지구에 들어서자 갑자기 단풍 우거진 설악산처럼 눈에 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험준한 산을 오르면서는 몽골의 초원이 나타났다가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다시 스위스 알프스로 변검술 부리듯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행여나 사람 손 탈세라 아제르바이잔 벽지에 꼭꼭 숨겨둔 보물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심심산골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비는 갈수록 드물게, 한 번 오면 폭우로 쏟아져 철근 콘크리트 다리를 부쉈고, 만년설 같던 눈도 가까이서 보니 케이크 위에 뿌려진 슈거파우더처럼 아주 얇게 표면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20대 때는 저 산에 너무 커서 아무도 건널 엄두를 내지 않던 커다란 빙하가 있었어요. 지금은 보다시피 흔적도 안 남았죠.”

나디로프가 마을 건너편 먼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동행한 현지 환경단체 에코프론트의 카난 할릴자데(27)와 나디로프는 돌이 굴러내려온 것도 사라지는 빙하·눈덮임과 관련 있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돌이 굴러 내려온 헤이다르산은 원래도 수목이 거의 없는데 눈이 줄어 점점 말라가는 탓에 작은 비에도 금세 무너진다는 얘기다.

줄어드는 빙하는 남극의 펭귄만 위협하는 게 아니다. 카스피해를 둘러싼 코카서스·중앙아시아에선 이미 생존이 걸린 문제다. 빙하는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내린 눈이 빙하가 되고, 빙하에서 서서히 흘러내린 물이 강을 이뤄 카스피해나 아랄해 같은 내륙호로 흘러 든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연평균 0.5~1m씩 두께가 줄고 있고, 이번 세기 말에는 최대 80%까지 감소할 걸로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전망한다. 특히 이 지역은 바다와 먼 내륙이라 전 지구 평균(1.07도. IPCC 6차 평가보고서)보다 훨씬 더 심한 온도 상승(2도)을 겪고 있다.

아랄해는 이미 90%가 사라졌다. 빙하가 주는 데다 빙하에서 발원한 강 주변에 펼쳐진 광활한 농경지가 끊임없이 물을 끌어당기고 있어서다. 하지만 농업이 경제 근간인 나라가 많아 농사를 포기할 수도 없다.

러시아 출신 IPCC 주저자였으면서 전문가 단체 ‘카본 랩’에서 활동 중인 알렉세이 코코린 박사는 “현재 추세에서 2500~3500m의 빙하는 어떤 수를 써도 녹는 걸 막을 수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생업(농사)을 이어가려면 점적관개처럼 물 사용 최소화 기술이 도입돼야 하지만 그럴 경제적 여력은 없다”고 했다.

타지키스탄 에너지 전문가 나탈리아 이드리소바도 “빙하는 생존의 문제”라며 “눈?산사태가 늘어난 건 물론 관개할 물을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바로 기후 취약국”이라고 했다.

 

◆기후금융이 필요한 이유

세계 각국이 온실가스 감축 대책을 논의하는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의 11일(현지시간) 개막에 즈음해, 세계일보와 사단법인 넥스트가 살펴본 아제르바이잔 현지 상황은 기후 문제의 현실을 대변한다. 이런 기후 변화는 올해 전례없는 더위를 겪은 세계 각국도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절로 해결되진 않는다. 온실가스 감축의 이면엔 이번 회의의 화두기이도 한 ‘돈 문제’가 있다.

아제르바이잔을 포함한 코카서스?중앙아시아에는 국내총생산(GDP)이 1000억달러(약 140조원)가 안 되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두 가지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는 자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무조건적 목표’, 또 하나는 국제사회 지원으로 달성가능한 ‘조건부 목표’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과 기후행동네트워크 동구?코카서스?중앙아지부(CAN EECCA)에 따르면 이 지역 9개국(러시아와 GDP당 배출 목표를 제시한 우즈베키스탄 제외)의 1990년 대비 2030년 무조건적 감축 목표는 평균 35%다. 그러나 국제 지원이 뒤따르면 50%까지 줄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기후금융은 이들 나라에 충분히 흘러가고 있을까. 글로벌 싱크탱크 기후정책이니셔티브(CPI)의 ‘기후금융 세계 현황 2023’ 보고서를 보자. 2021~2022년 전 세계 기후금융은 1조3000억달러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중 84%는 ‘내수용’이었다. 자기 나라 돈을 다시 자기 나라에 투자?지원했단 뜻이다. 중앙아시아나 동유럽으로 흘러온 건 360억달러로 3%도 안 된다.

지난해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발표된 일명 ‘송웨-스턴보고서’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전 세계 에너지 투자의 90% 이상이 중국과 선진국에 집중됐고, 저소득 국가의 비중은 7%에 그쳤다. 개도국의 기후적응에 필요한 자금도 지금보다 10~18배는 더 늘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도국이 스스로 발목을 잡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투명성 부족이다. CAN EECCA의 미디어 코디네이터 알리야 웨델리치는 “우리 지역의 부패지수는 상당히 높다. 기후금융 논의에서 큰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에코프론트 설립자 자비드 가라는 더 나아가 “정치인들이 기후변화 뒤에 숨는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제르바이잔 남부 도시 네프트찰라에선 4년 전 가뭄으로 쿠라강 수위가 내려가 바닷물이 역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50여개 마을에서 가축이 떼죽음당하고 농작물이 고사했다. 이 지역 활동가들은 강 주변 대농장의 과도한 관개와 염해 경보가 작동하지 않은 결과인데도 정부가 ‘기후변화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아무 대책 없이 넘어간다고 비판한다. 보스타케시가 5년째 돌더미에 갇힌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이런 이슈가 기후금융 논의의 본질을 가려선 안 된다고 이드리소바는 주장한다. 그는 “어떤 나라도 100% 투명하고, 100%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 서구에도 여전히 화석연료로 돈을 긁어모으는 사례가 많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웨델리치도 “우리 지역은 배출 책임에 비해 너무 큰 고통을 받고 있다”며 “공여국이나 기관이 의지가 있다면 (권위적 중앙정부 외에도) 지역 단위의 분산화된 소통 같은 여러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투명성은 기후금융과 함께 풀 과제이지, 선진국이 방패 삼아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바쿠(아제르바이잔)=윤지로 사단법인 넥스트 수석 zero@nextgroup.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