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산업용 시추 유정, 1846.’
아제르바이잔 바쿠 남서부, 카스피해에 접한 비비헤이밧에는 이런 내용의 안내문이 수줍게 서 있다. 목조 망루 같은 구조물 안에 세워진 ‘ㅈ’자 모양의 장치는 1846년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한 기계식 시추 설비다. 뒤쪽엔 유정 펌프인 ‘노딩 덩키’(nodding donkey)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관광객을 위한 조형물 같지만 실제 원유를 퍼올리는 중이다.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가 열리고 있는 바쿠는 도심과 외곽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도심엔 파리나 로마 거리를 떠올리게 하는 바로크풍 건물이 도열해 있다. 열대식물이 무성한 크고 작은 공원들도 독특한 풍취를 자아낸다. 현지인은 “COP29를 앞두고 급하게 조성된 공원도 있다”고 귀띔했지만 이방인의 눈엔 모두 우아하고 이국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버스로 몇 정거장만 벗어나면 ‘불의 나라’의 진면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석유 펌프가 우직하게 위아래로 지렛대를 움직여 원유를 끌어올리고, 카스피해 해변엔 ‘오일 리그’로 불리는 시추 플랫폼이 육중하게 서 있다. 쭉 뻗은 송유관도 쉽게 볼 수 있다.
◆같은 개도국이지만… ‘역성장의 기억’
바쿠는 1900년 전후 석유 중심지였다. 세계 석유 생산량 중 50%가 바쿠에서 나왔다. 총 연장 230㎞가 넘는 송유관이 도시에 깔렸다. 로스차일드와 노벨 같은 당대 재벌 가문도 바쿠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아제르바이잔 현지에서도 백만장자들이 탄생했다. 사업차 유럽을 오가며 유럽 건축양식을 눈에 익힌 이들은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를 초빙해 비슷한 건물을 짓게 했다. 바쿠 시내가 유럽을 닮은 건 이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오일 붐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20년 소련에 편입되면서 모든 생산시설이 국유화됐다. 서구 기술 발전에서도 점점 멀어졌다. 바쿠 석유 시설을 안내해 준 가이드 제이크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지만, 우리 시추 기술은 국제적으로 봤을 때 너무 비효율적이었고, 생산량 자체도 중동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 아무 경쟁력이 없었다“고 했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여러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부족한 기술과 자본, 정치 불안정과 불투명한 사회구조로 긴 어둠의 터널 같은 1990년대를 보냈다. 다른 개도국이 두 자릿수 성장을 하는 동안 10년 가까이 역성장을 하고 나서야 발 밑에 묻힌 석유와 가스, 광물을 디딤돌 삼아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부침의 흔적은 온실가스 배출량에서도 드러난다.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코카서스·중앙아시아 지역 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대 초와 비슷하거나 더 적다. 경제 위축으로 뜻하지 않게 상당 기간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없었던 결과다. 그래서 ‘산업 시추 발상지’, ‘불의 나라’라는 수식어에도 아제르바이잔의 누적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 세계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4%에 불과하다. 이 지역 많은 나라가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투르크메니스탄(0.14%), 우즈베키스탄(0.37%), 카자흐스탄(0.80%)의 역사적 배출 비중은 0%대다.
◆같은 산유국이지만… 출구전략의 유무
국제사회는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 책임을 지우던 ‘교토의정서’ 체제를 지나 모든 나라에 감축을 의무화하는 ‘파리협정’으로 넘어왔다.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과 각자의 능력’이라는 원칙 아래 중국·미국부터 나우루·피지 같은 태평양 섬나라까지 모두 온실가스 감축계획(NDC)을 내고 이행해야 한다.
아제르바이잔은 2030년까지 총 발전 설비의 30%만큼을 재생에너지로 채우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다행히 아제르바이잔은 재생에너지 잠재량이 높은 편이다. 북부 코카서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동부 카스피해로 빠져나가 연중 초속 7.9~8.1m의 바람이 분다. 바쿠의 연평균 풍속은 초당 11m로 북해와 비슷하다. 바쿠 북쪽 숨가이트 지방을 지나 황량한 준사막지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군데군데 육상풍력 단지가 조성돼 있었다.
연중 3분의 2는 맑은 날이다. 태양광 발전을 하기에도 좋은 조건이다. 지난해 10월 말에는 옛 소련에 속했던 모든 나라를 통틀어 가장 큰 230㎿ 규모의 ‘가라다그 태양광 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했다. 담대한 발전소의 사업자는 아랍에미리트(UAE)의 재생에너지 기업 마스다르다. 지난해 COP28에서 의장을 맡았던 술탄 알 자베르가 창업해 회장을 맡고 있는 회사다.
코카서스·중앙아시아의 재생에너지 잠재력을 알아채고 시장 선점에 나선 건 다름 아닌 이웃한 중동 산유국이다. 마스다르는 아제르바이잔의 네프트찰라, 빌라수바르 등에 각각 315㎿, 445㎿ 태양광 발전을 포함해 총 4GW의 계약을 맺었고, 앞으로 10GW까지 늘려갈 계획이다. 아르메니아와 우즈베키스탄에서도 2GW 이상의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에너지기업 ACWA파워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코카서스 지역 최대 규모의 풍력단지 개발 프로젝트를 아제르바이잔과 계약했고,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서도 1.5GW의 재생에너지 사업을 따냈다.
산유국이지만 오일 머니로 두둑이 곳간을 채운 나라는 ‘화석연료 이후’를 염두에 둔 출구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아제르바이잔 태양광 회사 프로비타즈의 최고경영자 에민 마마도프는 “아제르바이잔은 아직 유틸리티급 재생에너지 개발 노하우가 부족하다”며 “외국 기업과의 협업은 아주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바꿔 말하면, 산유국이라도 중동 부자나라와 카스피해 주변국이 처한 사정이 다르다는 뜻이다.
◆파워게임에 흔들리는 에너지 전환
코카서스·중앙아시아에 ‘화석연료와의 결별’은 아직 요원하다. 전력의 80%를 화석연료에서 얻고, 석유·가스가 경제 버팀목인 나라가 많다. 이 지역에서 가장 경제규모가 큰 카자흐스탄도 지난해 총 수출액의 48%를 원유로 벌었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먼 여정에서 이제 막 몇 걸음 옮긴 상황에서 강대국의 파워게임은 이들을 또 한번 멈칫하게 만든다. 유럽연합(EU)은 2022년 7월 아제르바이잔과 ‘2027년 유럽 석유 공급 2배 확대’를 담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현지 환경단체 에코프론트의 설립자 자비드 가라는 “(현재 인프라로) EU의 요구에 부합하기도 어려울뿐더러 2027년이 되면 유럽의 가스 수요는 줄 가능성이 있다”며 섣부른 투자에 대해 경고했다. 당장 EU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석유 시설에 투자를 하면 결국 빚만 떠안을 거란 지적이다.
지난달 6일 원전 건설을 놓고 국민투표를 한 카자흐스탄의 속내도 복잡하다. 카자흐스탄은 옛 소련 시절 동북부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반세기 동안 진행된 핵실험으로 100만명 넘는 주민이 방사능 피해를 입었다. 이런 트라우마가 있는 나라가 원전 국민투표를 한 건 단지 전력 수요 증가 때문만은 아니다.
카자흐스탄 변호사 바딤 니는 “러시아의 원전 건설 요구를 언제까지나 무시할 순 없었다”고 했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입장 표명을 유보해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게 발단이 돼 러시아의 원전건설 요구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가뜩이나 전쟁 이후 가스 수출이 급감한 상황에서 원전 수출도 하고 ‘앞마당’(중앙아) 단속도 필요하지 않았겠느냐”며 “서구와 러시아 어느 편도 들 수 없는 우리나라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전했다.
COP29의 핵심 의제는 새로운 기후 재원 마련(NCQG)이다. 기후협약의 전제인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과 각자의 능력’에 맞게 온실가스를 줄이려면 책임이 많은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의 경제적 지원이 필수다. 그러나 협상은 ‘자국의 이익’이라는 더 상위의 대전제에 갇혀 별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18~19일 브라질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사실상 NCQG ‘물주’들이 모이는 이 자리는 COP29 논의의 돌파구를 찾을 마지막 기회가 될 전망이다.
바쿠(아제르바이잔)=윤지로 사단법인 넥스트 수석 zero@nextgroup.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