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 반도체, ‘초격차기술’만이 파고 해법 [심층기획-트럼피즘에 조기경보 켜진 K산업]

① 반도체

美, 관세폭탄으로 공급망서 中제외 심산
메모리 추격 제동 걸려 삼성·SK 호재
中 현지 공장 점진적 철수 땐 타격 커

트럼프, 칩스법 사실상 폐기 폭탄 선언
韓기업, 2025년 취임 전 계약 마무리 속도
“對美 투자력, 협상 지렛대로 활용해야”

‘트럼프 스톰’이 다가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차기 대통령 취임이 두 달여 남았지만 당선 직후 시작한 인선을 통해 1기 때보다 훨씬 강력해진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기조를 여과 없이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1기 때의 ‘트럼피즘’과 비교할 수 없는 ‘슈퍼 트럼피즘’이 글로벌 산업·통상현장에 퍼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도 트럼프 스톰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방산 등 전 산업 분야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 중에서 한국의 최대 수출품인 반도체 산업이 트럼프의 자국 우선주의 기조 유탄을 맞아 자칫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반도체 초격차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AP뉴시스

18일 관련 취재를 종합하면 트럼프 미국 차기 대통령 당선인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 보내는 시그널은 명확하다. 트럼프 당선인은 ‘당근’인 보조금은 줄이고 관세 ‘채찍’을 휘둘러 해외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창출하길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어떻게’다. 대미 수출 비중이 큰 우리나라로선 트럼프 당선인이 공약한 10∼20%의 보편 관세가 상당히 큰 부담이다. 보조금 삭감은 예고된 수순이지만, 삭감 정도에 따라 우리 기업의 향후 대미 투자가 원점 재검토에 들어갈 수 있다.

결국 이런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트럼피즘의 영향을 최소화하려면 초격차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격변하는 공급망 속 한국 반도체가 필요 불가결한 존재로 거듭나지 않으면 트럼프 2기 행정부와의 ‘밀당’(밀고 당기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최근 궈즈후이(郭智輝) 대만 경제부장(장관)이 대만의 ‘자국 기술 보호’ 규정을 언급하며 “TSMC의 핵심 기술은 대만에 남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궈 부장의 발언은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짓고 있는 공장에선 항상 대만 현지보다 최소 한 세대 이상 뒤처진 칩이 생산될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당선인이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을 강화하려면, TSMC가 애리조나 공장에서 자사 최선단 공정을 이용해 칩을 생산해 줘야 한다. 이에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달 TSMC를 겨냥해 “반도체 기업은 매우 부유한 기업들이다. 우리 사업의 95%를 훔쳤고 지금 대만에 있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궈 부장은 다가올 트럼프 2기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TSMC의 독자적인 기술력을 핵심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맞섰다. TSMC가 파운드리 업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확보했기에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이다.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화학공학과)는 “한국이 고성능 AI(인공지능) 전용 메모리칩과 선행기술, 표준 및 로드맵 설정 등 제반 분야에서 미국의 대체 불가능한 핵심 파트너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국내 메가 클러스터 생태계 확충, 차세대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R&D)·인력 투자 등 중장기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발 ‘관세 폭탄’…위기이자 기회

 

트펌프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모든 중국산 제품에 대해 60%의 특별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대중국 관세 폭탄’은 글로벌 반도체 물류의 흐름을 바꿔 놓을 전망이다.

 

이날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미물류공급망센터의 이성우 센터장은 “과거 한국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중간재가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동했던 것에서, 앞으로 한국 반도체가 곧바로 북미로 건너가 역내 가공·조립을 거쳐 최종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식 뉴노멀 관세’에 적응하기까진 한국뿐 아니라 미국 반도체 수출기업도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게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큰 손이 바로 중국이라서다.

특히 미국의 대중 직접 제재 확대는 우리 반도체 산업으로선 ‘양날의 검’으로 거론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중국에 대한 제재가 심해지면 메모리 시장에서 중국의 추격 속도에 제동을 걸 수 있다”며 “한국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 정부는 2022년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가 본격화하자 60조원이 넘는 자본을 투입하는 등 반도체 자립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중국 메모리 산업이 제재를 받을수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가져갈 파이가 커진다.

 

반면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기업이 중국에 세운 공장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들은 페이드 아웃(점진적 철수)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향후 5년 내외론 중국 공장에서 핵심 반도체 제품 생산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봤다.

 

현재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공장은 전체 낸드의 28%를, SK하이닉스의 우시 공장과 다롄 공장은 각각 전체 D램의 41%와 낸드의 31%를 생산 중이다. 이들 공장에서 나온 메모리에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이 붙으면서 관세 폭탄을 맞거나 제재 대상에 오른다면, 공장 가동이 어려워질 수 있다.

 

◆“칩스법 폐지 비현실적…투자 위축 불가피”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달 말 한 팟캐스트에서 반도체지원법(칩스법)과 관련해 “사실 우리는 10센트도 쓸 필요가 없다. 관세만 높게 매기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미국에 공장을 세울 것”이라고 폭탄 발언을 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자국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도입한 칩스법을 사실상 폐기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칩스법은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생산 보조금 390억달러와 R&D 지원금 132억달러 등 5년간 총 527억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이 골자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삼성전자에 최대 64억달러(약 8조7000억원), SK하이닉스에 4억5000만달러(약 6200억원)의 보조금을 약속했지만, 실제 보조금 지급을 위해선 세부 조건을 규정한 본계약 최종 계약이 이뤄져야 한다.

 

현재 파운드리 절대 강자인 대만의 TSMC 외엔 칩스법상 법적 구속력이 있는 보조금 계약을 마친 사례는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내년 1월20일 트럼프 당선인 취임 전에 바이든 행정부와 계약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뉴시스

전문가들은 반도체 보조금이 줄어들 순 있어도 폐지는 사실상 어렵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판을 엎기엔 이미 칩스법에 따른 계약과 자금 지원이 상당 부분 진행됐다는 것이다. 인텔(115억달러)과 마이크론(61억달러) 등 미국 기업들도 여전히 최종 계약이 이뤄지지 않은 점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업계에선 우리나라가 바이든 행정부에서 입증한 대미 투자력을 협상 레버리지(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9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자료를 분석해 지난해 한국의 대미 투자 규모가 215억달러(약 30조5300억원)로 사상 처음으로 최대 대미 투자국이 됐다고 전했다. 이미 미국의 각 지방정부가 한국 기업의 투자로 고용 확대 등 경제 발전 효과를 확인했으므로, 트럼피즘에 의한 한국 기업의 투자 축소는 트럼프 당선인이 속한 공화당도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