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대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미국에서 지원받은 지대지 미사일의 러시아 본토 공격을 허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종전을 예고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두 달여 앞두고 내려진 전격 결정으로, 트럼프 당선인이 우크라이나에 불리한 종전을 추진할 것이라는 우려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바이든 대통령이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9일(현지시간)로 1000일을 맞는 가운데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사거리가 약 300㎞에 달하는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의 러시아 본토 공격을 허가했다고 17일 보도했다. 신문은 미 당국자들의 말을 인용,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가 전쟁에 북한군을 투입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ATACMS 사용을 허가했다고 전했다. 해당 미사일은 우선 북한군 1만1000여명이 파견된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 지역에 있는 우크라이나 병력을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당국자들은 밝혔다. 당국자들은 이번 결정이 전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으로 예상하지 않지만, 북한에 ‘북한군이 취약하며, 북한이 병력을 더 보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고 NYT는 전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지난 8월 공세로 뺏긴 쿠르스크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북한군을 포함한 5만명의 병력으로 대규모 공세에 나설 태세다. 우크라이나는 공세를 위해 집결한 러시아와 북한 병력, 러시아 중심에 위치한 주요 군사 장비, 군수 거점, 탄약고와 병참선을 타격하는 데 ATACMS를 사용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이번 결정은 러시아와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확전을 차단하겠다는 목표지만, 전쟁에 작지 않은 변수가 돌출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긴장이 더욱 고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러시아는 곧장 ‘3차 대전’ 가능성을 시사하며 반발했다.
로이터통신과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하원(국가두마) 국제문제위원회 부위원장인 블라디미르 자바로프는 ATACMS 허용과 관련해 “3차 세계대전 시작을 향한 매우 큰 발걸음”이라며 러시아가 즉각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궁 대변인은 “그런 결정은 미국의 분쟁 개입 측면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서 불길에 기름을 부으며 갈등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미국으로부터 받은 무기를 활용해 러시아 본토의 군사 시설 등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거듭 요청해왔다. 바이든 행정부는 확전을 우려해 러시아 본토 깊숙이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하지 않고, 지원받은 무기를 본토 공격에 사용하면 안 된다고 제약을 뒀던 것을 이번에 해제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북한이 러시아에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공급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파악하고 우크라이나에 ATACMS 수백발을 지원했다. NYT는 영국과 프랑스도 우크라이나에 사거리가 250㎞에 달하는 스톰섀도와 스칼프(SCALP) 미사일을 지원했지만, 본토 타격은 주저했다고 전했다. 미국의 ATACM 본토 타격 허가는 다른 미사일의 허용 여부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18일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본토 공격을 위한 장거리 미사일 사용을 승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의 결정을 두고 행정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고 NYT는 전했다. 일부 당국자는 이번 결정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과 유럽 동맹국을 상대로 무력으로 보복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한다.
CNN방송도 이번 결정으로 트럼프 당선인이 물려받을 전쟁의 위험성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 본토 공격을 위한 미사일 사용을 허가한 것은 상당히 도발적 조치라고 평가하고, 러시아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민간인을 표적으로 한 사보타주(파괴공작) 등을 벌일 위험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ATACMS 사용 허가가 시기적으로 늦었고, 미사일 공급량이 제한적인 데다 전황에 큰 변화를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에서 ‘리스크’만 키웠다는 지적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공격은 말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일은 발표되는 것이 아니다. 미사일은 스스로 말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이 말이 아니라 사용이 허가된 미국산 무기로 곧 행동에 나서겠다는 결의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역의 전력 시설에 대규모 공습을 이어갔다.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는 한겨울을 앞두고 전력 시설을 공격해 압박 수위를 높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가 미사일 약 120발, 드론 약 90기를 동원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고 밝혔다. 그는 “적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전역의 에너지 시설이었다”며 “불행히도 공습과 파편 낙하로 인해 이들 시설이 손상됐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도 모스크바를 겨냥한 드론 공격을 재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18일 우크라이나가 고정익 드론으로 공격을 시도했고, 방공망이 드론 59대를 파괴했다고 밝혔다.
전쟁이 1000일 가까이 이어지면서 트럼프 당선인의 공언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블룸버그통신 등은 최근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협상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자는 트럼프 당선인의 주장에 대한 공감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 발트 삼국 등 동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이 외에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가 현재 러시아에 점령당한 영토를 완전히 회복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계획은 현실성이 없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일부 영토를 내주더라도 독립 국가로서 주권을 유지해 러시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는 것만은 막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도 덧붙였다.